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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Dec 06. 2024

LIFE ORDER

삶의 순서

[QUIET RIPPLES] Beijing. 2007. 12. 15. PHOTOGRAPH by CHRIS


 솔직하게 생각을 말하면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던 사람들은 당황한다. 적당히 숨기고 적당히 드러내는 미덕이 존중받는 세계에서 나는 그럴 순 없고, 그러지 못하겠고, 그러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의식적인 타협에다 이해라는 이름의 점잖은 수식어를 덮어씌우고 산다. 상대의 허기진 마음을 읽고 그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맞추어주며 살아간다. 이것은 소유의 또 다른 형태는 아닐까? 갖지 못한 것을 갖게 해 주기 위한 끼워 맞추기 식의 위장된 소유욕 말이다. 개인이 품은 기본 가치들은 분명 선(善)이라는 외길을 가고 있지 않다. 충돌을 거치지 않고 마모를 제거한 포용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짧게 봐서 새해에는 떠나보내는 삶을 살되 ‘적당히’는 여전히 제거해야겠다. 모호하게 살아왔던 근성을 지켜나가면서 구체적인 것은 말이 아닌 형태로 전하고 싶다. 끝나지 않는 일이 끝났으면 좋겠다. 마음을 비우고 진정 떠나보내며 사는 삶을 열어보고 싶다. 새로운 그릇은 이미 담을 것이 없는 빈 그릇이다. 떠나보내며 사는 사람들 속에 삶, 조용히 밀려가고 싶다.



모든 자연은 그렇게 떠나보내며 산다. 菜根潭 


 바람이 성긴 대숲에 불어와도

 바람이 지나가면 그 소리를 남기지 않는다.

 기러기가 차가운 연못을 지나가도

 기러기가 지나가고 나면 그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군자는 일이 생기면 비로소 마음이 나타나고

 일이 지나고 나면 마음도 따라서 비워진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소유하기를 원한다.

 그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것.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것.

 그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면

 가리지 않고 자기 것으로 만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남의 것이기보다는 우리 것으로

 그리고 우리 것이기보다는 내 것이기를 바란다.

 나아가서는 내가 가진 것이 유일하기를 바란다.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기 위하여 소유하고 싶다고 거리낌 없이 말한다.

 얼마나 맹목적인 욕구이며 맹목적인 소유인가?

 보라, 모든 강물이 흘러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듯이

 사람들은 세월의 강물에 떠밀려

 죽음이라는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된다.


 소유한다는 것은 머물러있음을 의미한다.

 모든 사물이 어느 한 사람만의 소유가 아니었을 때

 그것은 살아 숨 쉬며 이 사람 혹은 저 사람과도 대화한다.

 모든 자연을 보라.

 바람이 성긴 대숲에 불어와도 바람이 가고 나면

 소리를 남기지 않듯이 모든 자연은 그렇게 떠나보내며 산다.

 
 하찮은 일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지나간 일들에 가혹한 미련을 두지 말라.

 그대를 스치고 지나는 것들은 반기고

 그대를 찾아와 잠시 머무는 시간을 환영하라.

 그리고 비워두라.

 언제 다시 그대 가슴에 새로운 손님이 찾아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2004. 12. 31. FRIDAY



 하나만 해야 전문인으로 구획되는 세계에서 감각이 사방으로 뻗어있는 촉수를 가진 이유로 이것저것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자주 질문을 던지곤 한다.


 "네 정체는 뭐야?"

 "당신은 누구죠?"


 "난 무엇이고 난 누구일까?"

 

 하긴 그 물음은 꼬꼬마 때부터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이었다. 시간이 이리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서 있다. 머리는 잠시 백지가 된다. 답을 찾지 못하고 질문이 돌다 보면 "왜 사는 걸까?"로 나아간다. 왜 사는가에 대한 질문이 매일같이 머리를 찔러댈 때는 절망적인 기분이었다. 아무도 답을 해주지 못했고 물어볼 엄두도 안 났다. 사는 게 괴로웠던 시기에 '사는 것이 먼저일까', '생각이 먼저일까'에 대해 답을 들었다. 살아있는 이유가 어찌됐든 간에 세상 속에 주어진 삶이 먼저이고, 생각은 자연스레 따라왔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생각의 상투가 엇나가 있고 변칙을 좋아하지만 상대의 말을 긍정할 수 있을 땐 토를 달지 않는다. 삶의 순서에 대한 의미 있는 분석은 철학책과 문학책과 현자들의 이야기보다 훨씬 명확하다. 괴로움으로 아우성치는 것은 자기 파괴적이다. 괴롭지 않은 삶을 위해 '왜 괴로울까'를 살피며 나를 관찰하고 있다. 아쉽게도 바쁨이 크다 보면 자기 관찰도 시들해진다. 눈은 밖을 향해 있는데, 안으로 관심을 돌리는 것은 어렵다. 잘못된 타인의 욕망과 욕심으로 인해 괴로웠든 즐거웠든 간에, 그것을 따라가지 않겠다고 부동하면 흔들리는 마음을 바라볼 수 있다. 마음을 탐구하면서 괴로움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졌다. 가끔씩 늙어간 욕망들 앞에서 욕지기가 올라온다. 다시 그런 불만까지 훌훌 털어내며 쓸모없는 화를 날려버린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감각이 평범해질까 봐 걱정도 되지만 마음이 편한 것이 최고다. 털털거리는 손발을 굴려가며 어떻게 살까 고민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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