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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RAUGHTSMAN'S CONTRACT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 보는 것은 믿을 만한가?

by CHRIS
[The Draughtsman's Contract. 1982]


하데스, 페르세포네, 데메테르.

바닥에 흩어진 빨간 석류 셋

씨가 없는 여인들에게서 진실을 찾는가?

찬란한 여신은 음울한 손길로 햇살을 빼앗는다.

어둠을 걷는 사람들

희망의 발걸음을 내딛고

정원에서 정원으로 사랑 찾아서

천천히 앞으로 걷는다.

성공하려는 사람이 되려 하는가?

정원의 동상이 깊게 숨 쉰다.

대지의 여인에게 키스를 남기고

저승으로 돌아갈 한 사람이 저기 왔구나.

시시한 재주보단 강인한 얼굴로

순진함과 교만함이 절대적 악은 아니지만

우연히 겹쳐지면 필연이 되는 자리에서

어찌하여 진정 뛰어난 자,

보이는 것에 이리 무관심한가.

아는 것과 그리는 것에서 갈등하지만

과연 그곳에 진실이 있을까?

보이는 것과 아는 것

그림과 시와 은유 속에서 진실은 말로 설명 못하네.

들판의 여신이여.

우리에겐 진실이란 흑백 피라네.

하얀 옷, 까만 옷, 무채색 피

생을 잇는 무채색 피



생이 숨을 쉬면 현재의 시간과 계약 중이지만 생이 멈추면 현재의 시간과 계약도 끝난다. 나는 살기 위해 누구와 계약했는가? 수수께끼는 수수께끼로 남겨둘 때가 재미있다. 문제의 비밀을 풀어버리고 나면 다시 푸는 사람 어디 있을까?


삶이라는 그림의 초안을 잡는 설계자들은 본능적으로 자신들이 그려낼 풍경과 소비할 행동에 대해 미리 손을 쓴다. 회색빛 은유를 뿌리고 청록색 배경을 깔고 흑백의 데생을 그린다. 그리는 재주가 있는 사람은 그리고, 말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은 말하고, 글 쓰는 재주가 있는 사람은 글을 쓰고, 요리에 재주가 있는 사람은 요리를 한다. 멀리 보면 이해되기가 어려워 보여도 하나씩 들춰보면 그렇게 알게 되는 것이 삶이다. 밖으로 보이는 것을 그리기는 쉬워도 정작 눈길을 돌려 자신의 얼굴을 그리는 것은 어렵다.


단조로운 열 두장의 풍광을 그리고 나면 우리에게 열세 번째 가을이 다가온다. 배반한 광기는 힘 있는 종마를 원한다. 잘 갖춰진 예의와 교만한 미소를. 공간이 구분된 곳에서 직설은 은유를 넘지 못한다. 밖에서는 안을 제대로 볼 수 없고 안에서도 역시 밖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사람들은 그저 세계를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을 뿐, 마음속 배척은 여전하고 머릿속 구별은 확연하다. 펼쳐진 세계는 보는 것을 그대로 믿으라고 하지만 언제나 눈이 머리보다 현명한 것은 아니다. 불투명한 얼굴로 신음했던 하루가 나를 부른다. 머리가 조금씩 송곳이 된다.


2005. 4. 2. SATURDAY



시각적인 태도로 내면을 보여주는 작업에서 간과되는 것은 머리이다. 고대에 참수했던 적장의 머리들은 승리의 표본이자 정복의 상징이며 우월의 표식이자 공포의 각인이다. 사람들과의 접촉에서 타인과의 차별점은 머리에서 쏟아져 나온 개성적인 언어였다. 혹은 냉정한 명령으로 표상되는 두상의 아우라였을 수도 있다. 아니면 머리에서 손끝으로 전해진 자동화된 감각일 수도 있다. 디자인적인 감성의 세계에서 내가 주로 사용하는 사물의 소멸점과 생성원은 바로 머리이다.


현대의 예술은 순수하게 그리거나 조각하거나 포착하거나 설치하는 것과 같은 행위에만 몰두하는 시절과 결별하였다. 제작이라는 행위를 실행하는 자가 있고 해석자와 후원자, 감상자가 별도로 존재했던 시절은 인간의 머리와 우주를 통합한 기술의 발달로 이미 하나의 기이한 형태로 변모한 지 오래이다. 내가 추구해 온 패션과 영상의 결합처럼 개별의 관념과 사상을 사회라는 무영의 우물에 투사하는 작업들은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철학과 결부되어 있다. 자신이 말하는 바가 명확하지 않으면 타자와의 구별되는 인식에서 묻히게 된다. 보통 예술이라는 뭉뚱거림이 주는 설명의 반경은 예술이 풀리지 않는 일상의 미스터리의 해법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만든다. 시간 속의 주체라면 공간으로 분리된 잠자리의 눈처럼 낱낱이 모자이크 된 스케치와 미묘한 대화들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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