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피 하늘 우주통신
방송이 거의 끝날 때쯤 하는 프로를 자주 보게 된다. <The Astronaut> 드디어 봤다. 우주 괴물에게 영혼을 먹혀버린 우주 비행사. 이제 그는 그가 아니다. 영혼이 그대 안에 머물러있지 않다면 심장에 묻은 꿈은 잃어버린다. 감정도 사라진다. 사람이 아닌 그에겐 아픔도, 슬픔도, 기억도, 애정도 의미가 없다. 사랑했던 사람에게 오직 이질적인 자신과 생명만 심으려고 할 뿐, 정복욕과 이기심과 회귀본능과 오싹함만이 가득하다. 무표정하게 서 있는 그에게 아내는 나직이 꿈을 속삭인다.
"당신. 하늘을 날고 싶어 했잖아. 하늘에 묻히고 싶어 했잖아. 기억나?"
무감한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NASA, FBI, CIA 정부 기관만이 아니라 각종 민간단체들의 외계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에서 시작된 연구와 수많은 교선들 뒤로 행성 너머에는 외계의 존재가 있다.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속 탈출(脱出)의 본능을 깨우는 쌍둥이의 모습은 아닐까. 영혼의 공유, 유체이탈, 공간이동, 힘의 분산, 광속의 발산, 무선통신. 외계인은 무서운 존재일까? 열여섯에 외계인으로 변신할 기미가 안 보이길래 스무 살이 되면 몸에 흐르던 빨간 피가 초록색으로 바뀌리라 기대했는데 별 소식이 없었다. 적혈구가 아닌 청혈구와 백혈구, 혈소판이 내장된 파란 피는 비린내가 나는지 궁금하다. 지구는 살기에 비좁다. 아니, 마음을 두기에 비좁다. 하늘에 묻히면 해답을 알 수 있겠지. 하늘을 날고 싶다.
2004. 11. 1. MONDAY
어렸을 때 공상과학 TV시리즈 <브이 V>를 보고 기묘한 흥분에 사로잡혔다. 지구를 정복하려는 파충류 외계인들과 이들을 제거할 위험분자인 과학자들의 흥미진진한 게릴라전을 보면서 난 외계인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땅에서 인내의 몇 갑자를 쌓은 뒤 크고 나면 인간세계에서 탈피할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치명적인 결함은 피가 초록색이 아니었다. 다치고 오면 무조건 빨강이었다.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처럼 말이다. 그래도 희망은 잃지 않았다. 언젠가는 지구인들과는 다른 외계인 동족으로 변할 거라고 생각했다. 강경옥의 만화 <별빛 속에>를 보면서도 상상이 뭉글뭉글 솟아올랐다. 꽉 막히는 일이 생길 때마다 거울 반대편의 세상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이팔청춘인 열여섯 살이면 멋지게 변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방년 스무 살에도 변화는 없었다. 아무도 오지 않았고, 나는 그냥 그대로였다.
상상이 시들해지는 현재까지 외계인으로 변하는 일은 없다. 체질의 변화는 있었다. 어렸을 때와 지금은 몸의 온도도 다르다. 겨울에 이불을 덮고 잘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몸에 열이 많아서 뜨거웠는데 시간이 갈수록 열기가 식는 것인지 냉혈동물처럼 차가워졌다. 원래 손발이 찼지만 지금은 온몸이 차갑다. 야외에서 쏘다니던 어렸을 때와 달리 태양에 민감해졌다. 까무잡잡한 아이에서 지금은 알비노처럼 바깥에서 오래 해를 쏘이는 것은 금하고 있다. 유럽의 태양에 벌겋게 긁히고 나서 사람들이 선망하는 지중해성 기후는 체질에 어울리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피부는 점점 누렇게 뜬다. 주변에 가득한 골프 마니아들이 골프를 배우라고 할 때마다 골프 치는 것은 부담스러워서 다 거절했다. 해에 민감하다고 하면 처음에 다들 이해 못 하다가 지금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한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사회성이 없는 것은 아닌데, 정말 사회성 제로로 보인다.
세상을 보는 시각도 달라졌다. 타인들에게 보이는 느낌도 다를 것이다. 성격은 어렸을 때와는 반대가 되어서 사람들은 접근을 어려워한다. 현재로는 그게 편하다. 친근하게 관심을 가지고 숨 막히게 가까이 오는 것도 부담스럽다. 나는 타인과 접하긴 해도 머릿속을 한번 훑고 올뿐 그들의 외면에는 밀접하게 접촉하지 않는다. 내 안의 나는 그대로이긴 하다. 그때의 목소리와 지금의 목소리는 변하지 않았다. 내 안의 캐릭터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주요한 음성은 두 종류이다. 젊은 여자와 나이 든 남자. 그녀는 침묵에 사로잡혀 있다.
"거기 살아있긴 한 거야?"
이미지를 연상하는 메모를 꾸준히 하지 못한 뒤로는 낱말로 상상을 이어가는 것에 한계를 느낀다. 운전을 할 때나 전화를 하거나 설명을 하고 있을 때 두 손과 입까지 바쁜 상황에서 머리에 생각의 음률이 분수처럼 솟아오르면 집중하기 힘들다. 지금은 쌓여 있는 생각을 나의 언어로 밀어내는 연습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