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안(白眼)
무섭다. 동일한 조건에서 그들을 바라보면 무섭지 않은데 이렇게 힘이 없고 아직도 덜 무너지고 할 일만 많아진 상태에서 과자처럼 부서뜨리며 진이 다할 때까지 온몸을 빨아먹으려고 달려드는 식인 모기들과 비슷한 소음에 질린다. 정신들 차리고 그만 떨어져 나가라고 꿋꿋하게 욕을 해 봐도 이후에도 그들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주위를 맴돌 것 같은 불안한 심정에 숨이 막힌다. 이리저리 찌르면서 달려드는 것을 너무 오래 봤는지 무감해져 버렸다. 퉁퉁 부운 상태에서 무시하다가 결국 반만 터진 채 곪은 걸 알게 됐지만 손댈 수 없이 커져버린 구멍에 소리치며 열에 들떠서 헛소리를 한다. 죽을 때까지 악귀처럼 붙어서 완전히 파멸할 때까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는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맴맴 돌며 갉아먹고 뜯어먹고 천연덕스럽게 웃을 것 같아서 매일매일매일매일 이곳을 떠나는 꿈을 꾼다. 뭐든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매듭 져진 것이 하나도 없다.
그들은 집에 돌아가면 좋은 아버지로 자상한 어머니로 살까? 자식들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목에 안겨서 뽀뽀도 할까? 그저 부모가 차려주는 음식과 용돈을 받으며 미래를 준비할까? 그들의 부모들은, 친척들은, 친구들은, 우리가 사는 의미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살면서 무엇을 느끼면서 살아갈까? 그저 사는 것일까? 생각도 없이. 주변이 너무 이상하니까 꼭 내가 싫어하는 삼류극장에 들어앉은 기분이다. 이건 거짓말. 구겨진 얼굴. 순식간에 달라진 표정. 싸늘해진 태도. 사람의 가치가 이렇게 쉽게 내려앉고 밟혀도 그저 살아야만 한다니 모순이 아닐까.
그런데 살고 싶었다. 아니. 아무 생각이 없었다. 위장이 쓰리고 혈관이 막혔다. 목구멍으로 침도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머리가 떨어져 나갈 것 같다. 무력함만 느껴질 때는 무서운 기분에 사로잡힌다. 양볼에 끝없이 어둠의 바람이 부는 듯이 구토가 밀려왔다가 바닥으로 내친 현기증에 아무거라도 잡고서 도망치고 싶었다. 추악한 말들. 행동들. 눈을 감아도 잊지 못한 소름이 땀구멍에서 꺼지질 않는다. 견딘다는 것은 힘겹다. 그 많은 싸움과 절망과 울분에 다 말라버린 것 같은 눈물이 솟으면 난 무엇을 잘못한 거지? 왜 난 할 수 있는 것이 없지? 내가 배운 것이 무슨 상관인가? 묻고 묻는다.
심장이 서늘해지면 왜 살아야 하는지 되새긴다. 살고 싶지 않다고 눈을 흘겼다. 하지만 난 돌볼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살아야겠지. 왜 나만을 위해서 살 수는 없는 것일까? 난 착하지 않은 걸. 성자도 아니고 그냥 세상을 느끼고 싶은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고. 한 순간 소스라치게 무서웠다. 아무도 믿을 수가 없다. 그렇게 잔인하게 늙고 싶지 않다. 비와 함께 타버려야 한다. 강한 화력으로 나를 약탈할 수 없게. 어느새 비도 그쳤고 찬 바람이 분다. 더웠다가 추웠다가 조절할 수 없는 감정들에 눈이 하얗다.
2005. 5. 7. SATURDAY
어렸을 때부터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기는 부끄러웠다. 시원하게 울고 웃는 것에서 어느 순간 멀어졌다. 내가 놓여있던 상황이나 펼쳐진 장면은 분명하게 기억하였으나 그것을 받아들인 머리는 감정을 표출함에 있어서 한 템포 쉼을 거듭했고 박자를 놓쳐버린 신호는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선택했고 배워왔던 인간들의 도덕과 가치들이 내부의 발산에 도움이 된다든지 나를 나답게 한다던지 억눌린 심정을 곱게 펴주진 못했다. 삶의 굴레 속에서 뛰쳐나가거나 개인적인 독립도 못했는데 가장의 무게를 지고 명찰도 없는 어른처럼 가문도 없는 집안을 살린다는 상황이 어린아이처럼 응석을 부리고 싶은 입술을 불만족스럽게 튀어나오게 했다.
생각과 감정, 마음은 모두 숨은 성질이지만 표현에 있어서 각기 다른 심방을 가지고 있다. 생각을 보이는 것은 즐겨하던 놀이라 어렵지 않았고 마음을 보이는 것은 인간적으로 통하는 자들에게는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감정을 보이는 것은 내밀한 치부를 드러내는 것처럼 부대낌과 힘겨움을 깍지 끼고 있었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선 쌓아두기만 하고 정리할 수 없는 사람들과 멀어져야 한다. 그런데 욕심을, 욕망을, 기대를 쌓아두는 사람들의 어떤 점이 개인적인 무관심과 본성까지도 억누르며 함께 하도록 만드는 것인지 자석처럼 두 눈이 그들을 향해 있다. 변덕스러운 마음을 돌아보는 눈길은 검은 눈동자를 지우고 박하사탕을 쑤셔 넣으며 망막 속으로 파고든다. 눈을 떠도 앞이 보이지 않고 하얗고 시리고 화하다. 기분이 얼음처럼 차분해진다. 감정의 결이 하나씩 갈라지며 돌출된 촉수 위를 더듬거린다. 서툴게 말하기 시작했으니 가슴속에 쌓인 검은 물부터 토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