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VID HUME, HUMAN NATURE

《데이비드 흄 X 줄리언 바지니》÷ 크리스 =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by CHRIS
[Bilderbogen, Paul Klee 1937]


컬래버레이션과 합작의 이름 하에 이미 세상을 달리 한 철학자의 의식을 AI 파노라마에 투영하여 대화도 가능하고 고흐의 그림을 디지털로 재생하여 미디어아트로 변형하는 것도 가능하며 베토벤의 클래식을 판소리나 국악으로 혼용하여 새로운 장르로 만드는 것도 가능한 시대다. 저작권에서 벗어난 옛글 또한 재가공하거나 편집을 통해 변형하는 것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으며 대가의 그림풍을 달리하여 자화상을 그리던지 다른 이의 얼굴을 그리던지 사물을 그리던지 풍경을 그리던지 아무도 탓할 이는 없다. 오직 그 활동 속에서 세상을 향해 거대해지겠다는 염원보다 자신을 드러내는 소망이 가득하다면 말이다.


누군가가 물었다. "당신이 말하고자 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해도 상관은 없다. 그러나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너의 표현은 그저 뱉어낸 하나의 호흡으로 숨 쉴 수 있는 자기만족에 머무른다. 심지가 빳빳하게 죽을 때까지 불꽃을 태울 수도 없다. 그래도 그 방식을 고수하겠는가?" 한참 고민하였고 저 깊은 곳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동시대의 타인이 내 삶을 이해하길 바라는 것보다 살아가면서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가치 있는 것은 없다."


자기를 드러내는 작업이나 말하는 목소리가 힘을 받기 위해선 고유한 목소리를 지속시킬 힘이 전제되어야 한다. 개성적인 사상이 온몸에서 울려 퍼지기까지 나는 나를 지탱하는 몸체를 운영해야 하고 몸체와 연결된 주위의 삶을 이끌어야 하며 사회적인 공간에서 주체자로서의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존재에 해석이 더해지고 씨가 뿌려지면 원래의 낱알은 발아하였을 때 태초에 주어진 형상을 탈피한다. 외피를 벗어날 수 없으면 주체적 생명은 껍질 속에서 사장된다. 껍질을 뚫고 꽃 피워진 모습은 얼마나 비를 맞고 어떻게 가꾸어졌으며 어느 세기의 바람과 어떤 비옥한 토질 속에서 영향을 받았는지에 따라 변화한다.


관심 있는 대상을 보면서 해석 전의 본질을 찾는 것에 집중한다. 데이비드 흄을 의식 투영의 모델로 선택한 줄리언 바지니(Julian Baggini)의 콜라보에 관찰자로서의 나, 크리스의 사견을 나누어본다.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한 철학자의 인간 본성을 탐구하는 작가적 여정을 따라가고 있으나 데이비드 흄과 전혀 상관이 없을 수도, 줄리안 바지니의 철학적 순례와 완전히 다른 내용일 수도, 철학서나 인문학 도서나 자서전과도 일치하지 않는 엉뚱하고 개인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밝혀둔다.




"여행에는 장점이 많다.
편견을 몰아내는 데는 여행이 최고다."
데이비드 흄

인성론.jpg [A Treatise of Human Nature, David Hume]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20세기의 논리적 실증주의와 과학적 회의주의, 윤리학과 메타 윤리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영역을 포괄하여 현대의 인식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데이비드 흄은 그의 초창기 저작이자 최고의 문제작인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A Treatise of Human Nature (인성론)》에서 제시하듯이 형이상학적 문제를 사유하는 방식이 현실 문제를 풀어가는데 중요하다는 것을 그의 삶을 통해 몸소 보여준 철학자이다. 흄의 삶의 시작점이자 종착점인 스코틀랜드 에든버러(Edinburgh), 그 속에 샌드위치처럼 담긴 라플레슈(La Flèche)와 파리, 프랑스에서의 두 차례 여정은 문필가로서의 시작과 종말을 선언한 중요한 이정표였다. 철학자로서 지적인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소수의 엘리트적인 생활은 철학과 역사가 경시되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선택지이다. 그러나 첨탑의 이론처럼 부단한 고독을 씹고 바벨탑을 올라간 자는, 하나였으나 빛으로 쪼개진 만국의 언어를 이해하는 통찰을 얻어낼 것이다. 인간본성을 살피는 과제를 일생의 과업으로 삼았던 흄은 철학자의 세계를 해부학자와 화가의 일에 비유했다.


"해부학자처럼 부분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각 부분의 상황과 그것들 간의 연계를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다음에서야 비로소 화가처럼 정확하고 바르게 전체를 설계할 수 있다. 그 결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추상적인 사유가 아무리 냉정하고 건조하다고 해도 실천도덕에 실질적으로 기여하게 되고, 이렇게 실천도덕은 더 올바른 행동 수칙과 더 설득력 있는 권고가 된다."

《인성론, 데이비드 흄》


문필가로서 철학을 완성하기 위해 자립적인 생활을 도모하던 흄은 브리스틀에서 설탕을 팔며 생계방편을 찾고 상업적인 도약을 시도했으나 그의 첫 번째 자립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흄이 인간의 본성에 대한 사상을 확립하는데 두 가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학문을 연구할 정도의 "적정 액수의 돈"과 "학문, 글을 쓰는 기술"을 가진 문필가의 삶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철학에 대한 관점이 학창 시절에 받아들인 권태롭고 수동적인 태도와 달라져 있음을 발견한다. 대상에 대한 투정 같기도 하고 내부의 조곤조곤한 의견으로 들리기도 하고 현상에 대한 냉정한 비판이면서 자유를 고하는 하나의 목소리, 그것은 철학이 내포하는 포괄성이며 삶의 반영이자 투사의 외침이다.


생활을 꾸릴 때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조건들은 반복적으로 스스로를 개선하고 정리하는데 시간을 할애하게 만든다. 외면적으로 무엇인가 이룬 것처럼 보이는 나에겐 뚜렷한 생의 목표가 없었다. 급작스럽게 사회로 던져지고서 무엇이 되기보다 그저 살기 위해서 힘을 쏟았다. 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른 상태로 하나씩 고장 난 사람들을 이끌고 타인에 손에 휘둘리는 병기처럼 시간을 갈아버리는 분쇄기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경제적 자립은 정신적인 자립에 중요한 초석이다. 흄이 평생을 구애한 문필가의 삶이나 내가 추구하는 예술가의 삶이나 먼지를 털고 보면 매 한 가지다.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서 독립된 인간으로서 자유롭고자 한다면 첫 번째 조건은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고 그다음엔 경제적인 자립을 획득해야 하며, 이 기본이 갖춰진 상태에서 원하는 것을 해야 한다. 스스로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자립과 체력을 길러야 타인에게 구속받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


우주적 차원의 거창함은 벗어던지고 한국사회의 일원으로서 아무리 서양의 사상이나 고급적인 정보를 많이 접했다고 하더라도 육체가 위치한 실질적 공간의 규칙을 벗어나는 것은 길어야 백 년의 수명을 가진 육체의 필연적인 입장에서 쉬운 일은 아니다. 육체와 정신만으로 규정할 수 없는 한 인간의 지각과 마음은 시간 위에 고착된 습관을 지배하고 몸속에 단단히 체화되어 말하는 것들에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댄다. 르네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존재(res cogitans) 위에 자연과학의 경험주의적 철학을 덧댄 흄의 인성론은 회의주의적인 합리주의를 도출해 냈다. 사상을 건설하는 제작자의 입장에서 사상의 형상은 사상적 토대와 벽을 통해 구조화되고 가시적이 되며 사상을 지탱하는 것이 벽이든 토대든 간에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라는 근본적인 문제와 접합하게 된다. 존재에게 알이 먼저든 닭이 먼저든 상이한 모든 진실은 항상 일치한다.


"실재와 인간 본성에 관한 정확한 견해를 형성하는 능력은 전문적인 과학 지식이 아니라 경험 전반, 그리고 이것들이 서로 합치되는지에 주의를 기울이려는 의지에 달려 있다. 관습 혹은 습관은 인간의 삶에서 위대한 안내자 역할을 수행한다. 우리의 경험을 유용하게 만들어주는 것, 그리고 사건의 연속성을 만드는 것, 즉 과거에 벌어진 사건과 유사한 사건이 미래에도 벌어지리라 예상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습관이라는 원칙뿐이다."


사소하고 중요한 상황에서 바른 행동을 연습하면 어떤 상황에서건 효력을 발휘하는 인격을 얻을 수 있다는 흄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고귀한 품성을 가지는 것과 스스로의 행동을 인식하는 것은 한 개인에게 지속적인 수련과 집중을 요구한다. 습관에 대한 중요성과 예절, 도덕과 같은 개념과 수학적 관념들의 관계를 추론하는 일과 사실문제는 전혀 다르다는 흄의 인식은 실재란 우리가 관습과 습관의 본능에 매달려 간신히 붙잡고 있는 어떤 것일 뿐이라는 줄리안 바지니의 중간자적인 발언에서 머물러 있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평범한 삶에 대한 이성적 추론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전혀 없다. 철학으로부터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더 큰 진리가 아니라 더 큰 안정성이다. 철학은 더 엄밀하고 꼼꼼한 추론 절차 덕에 이러한 안정성을 제공한다."


이성적인 추론과 설득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합리적인 주장에도 불구하고 취향과 감정의 추론에 따른 이성 추론이 알고리듬(algorithm)이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판단뿐이라는 흄의 견해는 회의주의자들의 신중함과 겸허함을 가진 철학적 태도에 대해 재고하게 만든다. 인상과 관념으로 구분되는 정신의 지각에서 정신이 관념을 조직하는 시공간의 인접성, 유사성, 인과를 바탕으로 경험의 재현적 세계를 통해 이성과 지식의 선험적 내재성을 증명하는 삶은 결국 합리주의와 경험주의가 혼재된 현실을 반영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자유는 자발적 자유로서 의지의 결정에 따라 행동하거나 행동하지 않을 힘이라는 흄의 의견에는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전제를 포함하여 전적으로 동의한다. 정치에 대한 보수주의적인 시각과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적인 견해, 개선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을 검토하고 변혁을 급진적으로 진행하는 것을 우려하는 그의 중용적인 노선은 극단적으로 치우친 현대사회에서 적절히 좌우의 장점을 채택할 필요가 있다.


"나 자신이라 부르는 것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늘 뜨거움이나 차가움, 빛이나 그늘, 애정이나 미움, 고통이나 쾌락 같은 이런저런 지각을 만나게 된다. 나는 이러한 지각 없이 나 자신을 포착하지 못한다. 지각 이외에는 무엇도 관찰할 수 없다. 깊은 잠에 빠질 때처럼 나의 지각이 사라지면, 그동안 나는 자신에 대해 무감각해지므로 엄밀히 말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흄은 자아란 생각과 감정, 지각하고 있는 것 이외에 없는 것이며 경험의 질서이자 정연한 집합체라고 말한다. 즉, 자아는 영원성을 가진 지속적인 통일체가 아니라 덧없이 사라지는 경험의 흐름이며 존재가 공간에 놓일 때 붙여지는 각자의 사회적인 이름이자 불교의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개념처럼 끊임없이 변하는 동시에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대상의 실체는 별다른 의미도 없고 실체 또한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존재하는 것은 대상의 성질일 뿐이다. 흄의 경험주의 이면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중용의 동양철학과 중도의 불교 사상들이 혼재되어 표면에 드러난다. 자아 동일성의 원천인 "기억"은 지각들의 유사관계를 만들어냄으로써 변화된 시간 속에서 한 인간의 동일성을 산출해 내는데 기여하며 과거와 현재의 상이한 지각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보여줌으로써 우리는 지각들의 다발 속에서 자아의 동일성을 발견하게 된다. 생각과 감정과 기억과 욕망과 감각의 다발인 인간의 존재는 원자들의 거대한 다발인 물리적 우주와 같은 시발점을 가지면서 생태주기를 가지고 변화한다. 모든 실체는 불완전하고 확정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해석되길 거부하였다는 사실과 물질적인 것은 성주괴공(成住壞空)하고 마음은 생주이멸(生住異滅)하며 인간의 육체는 생로병사(生老病死)한다는 불법의 진리는 상당히 유사점이 있어 보인다.


데이비드 흄이 《영국사》 저술을 통해 스코틀랜드의 타키투스라는 별칭을 얻었던 저술가로서의 막대한 성공 뒤 철학자라는 외길을 걷지 않았다는 세간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가 꿈꿨던 문필가적인 특성에는 단순히 철학자로만 비치는 숙고함보다는 인간 본성을 정치, 종교, 역사, 철학을 통합한 풍부한 상상력과 사고로 기술한 유연함이 존재한다. 인간의 정념과 관념을 심오한 이성적 사고와 명료한 문체로 인간적인 시선을 통해 조합해 내는 능력은 지속적인 사고와 회의적인 퇴고 과정이 없다면 쉽게 얻어낼 수 없는 독특한 작가적 시선인 것이다.




찰나의 시간, 그 두 번째 여행


hume rousseau.jpg 스코틀랜드 의회 건물에 수놓아져 있는 데이비드 흄과 장 자크 루소의 태피스트리


"우주라는 거대한 체계에서 인간이 발견하는 것은 찰나 같은 시간 동안의 극히 작은 부분일 뿐이다. 이러한 제약 아래에서 우주 전체의 기원에 관해 어떻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파리에서의 풍부하고 지적인 교류 생활은 아이러니하게 흄이 문필가로서의 저작 생활을 마무리하는 계기가 된다. 살롱 문화와 마담, 사교와 후원자들, 왕정과 귀족들, 외교생활과 정치, 종교와 관념, 유신론과 무신론, 이신론과 불가지론, 신과 선악, 자연주의와 회의주의, 과학과 형이상학, 역사적 태도들과 사회에 대한 인식들은 18세기 상류사회를 거쳐 현재까지 논란이 가득한 구성으로 가득 차 있다. 책을 읽다 보면 뜻하지 않게 그게 사실이었든 아니었든 이론만으로 익숙한 인물들의 이면들을 볼 수 있다. 데이비드 흄과 장 자크 루소, 당대 계몽주의자들의 만남은 호의와 반격이 유쾌하지 않게 섞여 있다. 이미 사후의 인간들에게 만남의 이면이 어떠했는지는 각자의 입장이 있으므로 판단은 하고 싶지 않다. 앨런 램지가 그린 흄의 넉넉함과 풍요로움이 아르메니아식 코트를 입고 모피 모자를 쓴 루소의 질투를 불러일으켰다니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계몽적인 인간의 초상이란 그저 화가가 포착한 한 순간의 몽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자연은 모든 인간 사이에 큰 유사성을 보존해 왔고, 우리가 타인에게서 발견하는 정념이나 원리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 자신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악이라는 사실이나 존재는 절대로 찾을 수 없다. 대신 당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리면 찾을 수 있는 것은, 살인이라는 악행을 향해 일어나는 반감이라는 감정뿐이다. 사실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사실이란 이성의 대상이 아니라 감정의 대상이다. 악은 당신의 내면에 있지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선악은 소리, 색깔, 열기, 냉기와 비슷하며, 오늘날의 철학에 따르면 선악은 대상의 성질이 아니라 정신이 지각한 것이다. 인류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성향의 사람들이 지닌 정서가, 그 반대인 원칙보다 미덕에 더 이롭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 본성에 대한 중용의 입장을 견지할 수 있다."


인간의 얼굴을 한 도덕은 인간의 좋은 면과 악한 면이 일반화할 수 없는 실질적 상황에서 가상의 완벽한 인간이 실재에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간과하고 특정한 사례에 집중하는 쏠림에 편향된다. 도덕적 다원주의로 표명되는 좋은 삶의 요건은 여러 가지이며, 여기서 우리는 행복과 복지를 향한 각자의 선택에 당면하게 된다.


"정의가 출현하는 기반은 인간의 이기심과 부족한 관대함, 그리고 자연이 인간에게 마련해 준 결핍과 부족뿐이다. 공평함과 정의의 규칙은 특정한 상황과 조건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그 기원은 효용이다. 효용은 사람들의 정의를 엄격하고 규칙적으로 준수하게 만든다. 자주 거론되는 것처럼 강도와 해적이라 하더라도 나름의 새로운 분배 정의를 확립해서 공평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법칙을 서로에게 일깨워주지 않으면 악의 동맹을 유지할 수 없다. 이 법칙이 나머지 선한 인류의 정의 법칙을 위반하더라도 그러하다."


철학자들 중에서 정치와 종교, 경제와 물질적 번영에 관한 통찰을 중도적인 입장에서 폭넓게 자기 언어로 파악해 내는 사람은 드물다. 문학가적인 사색으로 세상을 포용하던 데이비드 흄은 음식도 좋아하고 접대도 환영하고 사교도 즐기며 공부도 열중하는, 삶에 열정적인 북부의 에피쿠로스였다. 자유주의자의 향기를 풍기는 흄은 죽음과 가까이 있을 때조차도 유쾌한 죽음을 맞기 위한 온화함과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돌볼 집도, 자식도, 복수하고 싶은 적도 없어 흡족하게 죽을 수 있다는 흄의 말은 순간을 충실하게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살면서 불필요한 욕망에 대해 미련을 떨굴 수 있는지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했던 그동안의 명상과도 일치하는 면이 있었다. 데이비드 흄이 보여준 개방적이고 사교적인 명랑함은 인간의 삶에서 죽음이 불가피함을 인지하는 동시에,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상의 것이란 지상에 있는 동안 좋은 삶을 영위하는 것이라는 진실을 수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은 죽음에 대한 준비다.
"Philosophy is a preparation for death."
Socr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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