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회전, 없는 일상
엄지발가락을 자세히 관찰한 적이 있었던가? 가시에 찔리거나 크게 접질려서 불편함을 맛볼 때서야 퉁퉁한 저 물건을 바라본 건 아니었던가? 아플 땐 커 보이는 작은 부분들이 상처가 가라앉고 아픔을 느끼지 않으면 관심의 범주에서 벗어나버린다. 다시 무신경해지는 감각. 나는 나를 이끄는 구속들을 내버려 둔다.
엄지발가락.
담배꽁초.
버려둔 자아들.
잊힌 것들.
관심에서 제외된 사물과 현상들.
무심히 지나치는 공간에 함께 놓인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마음속으로 서서히 노안이 찾아오는데, 돋보기 없이 산다니.
무방비 상태로 도시를 걷고 있다.
번지수가 지워진 터널은 음습하다.
목적지를 앞에 두고서 공회전 중이다.
지금은 할 게 없다. 제길.
버스천장을 울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잠시 졸았나 보다. 눈을 뜨니 가슴을 헤집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어지러웠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극도로 저조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잊고 있던 불안과 우울이 겹치는 날이다. 컨디션이 엿 같다. 버스에서 내려 입 안에 고인 침을 쏟아내었다. 물처럼 쏟아지는 침이 투명하고 끈기가 없다. 구역질을 하면 침만 나온다. 잘 짜진 알로에 같은 역겨운 냄새. 엘리베이터에서 다시 입을 열었다. 폐수처럼 흐르는 아밀라아제. 초록색 요오드는 매끈한 기색이 없다. 문을 열자마자 욕실로 직행했다. 몇 차례 침을 쏟곤, 그 자리에서 뻗어버렸다.
자기 샵을 갖고 이색적인 그룹전시회를 열고 분주히 발걸음을 놀리면서 각자의 세계로 넘어가는 사람들. 나의 상처 입은 하루는 오늘따라 길게 욕지기를 쏟아내고 있다.
자유의 시간은 왜 기한이 정해져 있는 것일까?
나는 좀 더 느끼고 싶고, 더 높이 날고 싶은데..
내일은 재판에 참석해야 한다. 잠은 오지 않는데 눈꺼풀이 무겁다. 머릿속이 완전 쓰레기통이다.
종이호랑이 > 실제호랑이
정신적 부담의 무게는 보이지 않는 순간에 거대한 그림자를 갖는다. 누군가 깨끗한 종이를 내밀면 실재를 관찰할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허약한 의지와 실천의 부주의가 막연한 두려움을 부르는 것이겠지. 미래를 관망하지 못하겠다는 설익은 외면에서 탈피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내일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2006. 7. 12. WEDNESDAY
발목이 불편하다고 느낀 지는 꽤 되었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하이탑을 신으면서 발목을 보호해준다기 보다는 발목 언저리가 쓸리고 조인다는 기분에 몸이 피로해서 그런가 보다 넘겨버렸다. 가볍게 할 것을 정리한다는 명목하에 과감하게 생각을 펼쳐버린 결정이 심적으로 부담이 된 것 같다. 오른쪽 발목이 부어있다는 것을 두달 전에 알긴 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그냥 넘어갔더니 십 년 전 왼쪽 손목에 커다란 낭종으로 부풀어오르며 피로한 몸을 증명한 터널증후군처럼 발목에 혹부리 영감을 하나 달아놨다. 당시엔 병원을 갈 시간도 없고 가기 싫어서 혈관을 심하게 눌러 마사지한 뒤 낭종을 터트렸다. 그런데 이 발목뼈에 매달린 낭종은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 않다. 민간요법도 믿을 게 못 된다. 온몸이 삐그덕거린다.
수십 년을 세상과 마찰하며 내면은 단단해졌을까? 비행기에서 페터 한트케의 글을 읽으며 하나의 소재를 갖고서 의식을 줄기차게 따라가며 서술하는 매력을 느꼈다. 타인의 이해에 자신을 맞추는 삶은 자기 삶이 아니다. 외롭더라도 난 나여야 한다. 영화관에 가서 옛날 영화를 보고 상대를 떠올리며 생활에서의 자신을 돌아보는 일, 시야와 귓가가 온통 나와 당신을 향한 감각으로 차 있다니 그 소소함에 한결같이 고독한 사람들이 빠져든다. 일 년이나 십 년도 아니고 일평생 무명으로 살면서 지속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건 어려운 일일 테다. 모두가 지쳐버릴 거야. 그래도 난 일어나서 걸어야지. 저 고개 너머에서 생이 다한다고 해도 가 봐야지. 그건 살고자 발버둥치던 나에게 약속했던 생의 한가운데 선 나의 의무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