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알튀세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L'avenir dure longtemps, suivi de Les Faits》는 자서전인지 고백서인지 혼동되었다. 루이 알튀세르가 아내 엘렌 리트만(Hélène Rytmann)을 교살하고 정신착란의 면소 판결을 받은 뒤 스스로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해설과 함께 삶의 일대기를 써 내려간 글을 읽으면서 인간본성에 의문을 가지느라 학문적 이데올로기를 수립하는데 빛이 바랬던 청춘의 시간이 떠올랐다.
과거를 탐구하면서 철학서와 인문학서, 에세이와 수필, 회고록과 자서전, 소설과 비문학의 경계를 구분 짓기 어려워지고 있다. 작가들은 한 편의 글을 내놓기까지의 정리가 내부적 사실을 여는 출발을 예고한다.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론》을 읽는다》, 《레닌과 철학》 등 서구적 마르크스 사상의 확립에 기초적 단서를 제공했던 루이 알튀세르의 내면으로 파고들어 가본다. 작가가 스스로를 "광인"이라고 불렀던 시간으로 함께 달려가 명철한 지성이 무의식의 관념에 패배한 개인적인 역사를 살펴본다.
당대의 철학자가 정신분석학을 잘게 오려 넣은 문장들은 정신의학적인 면죄의 이데올로기와 법적 구속력을 내포하는 원죄의 이데올로기의 간극에서, 미쳐가는 사회와 미친 인간들 사이에서도 미래의 지속이 가능할지 점쳐보는 정치와 사회의 불분명한 경계를 넘어선 개인적인 이론의 교본이 될 것이다.
"하나의 불안을 가라앉히기 위해
한없이 다른 불안들을 무릅쓰기까지 하려는 것이 내 운명이다."
루이 알튀세르
우리가 여기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만 미래는 지속될 수 있다. 경험적으로 미치기 바로 직전이 욕망의 또렷함을 스스로 자각하는 정상적인 기준점이 된다. 광란의 공유와 그에 대한 동감은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우발적이든 의도적이든 간에 이미 주체가 저지른 행위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없다. 육체적으로는 구속당하지 않았지만 아내를 살해한 철학자가 불러일으킨 사회적인 충격 속에서 침묵을 강요당한 알튀세르는 세상을 향해 내부적 진실을 폭로한다.
우리는 법정출두와 그 규정과 형식의 부재, 영원히 끝나버린 부재들 속에서 오늘날 뉴스를 장식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도발적이면서도 방어적인 행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만해. 이제 다 끝났다고." 남자가 말할 때마다 나는 소리친다. "도대체 언제?" 정신 나간 인간들이 열망하던 환상과 달리 시작점에 머무른 시간에서 끝난 사실은 없다. 생활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도돌이표이며 나무가 쓰러진 것은 변함없고 폐허가 된 감정을 구제할 수 없는 것도 그대로이다. 자기 정당성을 해명하는 인간들의 착란을 동반한 허상은 지긋지긋하게도 길다.
어머니에 대한 갈망, 아버지에 대한 증오,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재현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루이 알튀세르의 정신병은 강한 자의 탈을 쓰고 약한 자를 보호하는 책임을 놓고 싶으나 생의 의무 속에서 쇠약해진 연결고리를 방치할 수 없는 나의 끈질긴 현재를 상기시킨다. 언어적 재능의 이데올로기이자 근육의 육체 운동을 통해 자신의 육체 속에서 스스로 사고하고자 하는 과대망상증은 전능한 우울증으로부터 결코 도피할 수 없다. 결벽한 어머니에게서 사랑받고 싶은 사내의 금지된 욕망, 몽정 중에 갑자기 이불이 들쳐지는 발기된 수치심, 성병에 표피가 거세당하는 완성될 수 없는 불안, 어머니가 사랑했던 죽어버린 남자의 이름을 달고 사는 잉여의 나날들, 반항할 수 없는 위치에서 무능함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과 사랑의 선택에 관해 주도권을 갖고 싶은 비정상적인 환상 또한 알튀세르가 모성에 대해 갖고 있던 자아 의지적인 독립의 정체성과 정신분열의 기점을 보여준다.
알튀세르의 편집증적인 사랑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재료이다. 사회적 동지이자 어머니와 같았던 엘렌을 향한 탈출과 회귀, 변질적인 여자관계의 과시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어머니를 향한 한 남자의 기이한 강박은 기이하게 뒤틀린 채로 혼재되어 어지럽게 나열된다.
가끔 철학자들의 주장이 말장난처럼 들릴 때가 있다. 신뢰가 가지 않는 교조적인 이데올로기와 같은 모습이다. 현실과는 상관없는 이론으로 사람들을 사지로 내몰면서 정작 거창한 관념을 수립한 인간들은 올바른 자세를 취하고 있지 않다. 정치경제적인 사상 관념 아래 도배된 한 철학자의 성적으로 억압된 상상을 읽어 내려가며 고독과 책임은 연결성이 부재하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에 의해 암시되고 강요된 거리에 놓였다고 믿는 알튀세르는 육체를 활동적으로 활용할 수 없는 도시적 소년의 수축감을 벗어날 탈출구를 발견한다. 수동적이고 사변적인 의식에 대해 활동적이고 부지런한 육체의 우위성을 인정하는 마르크스 사상에 매료된 그는 몽상적이라고 말해지는 이론적인 욕망 위로 실제적 실천인 노동이나 투쟁적인 정치 행동을 통해 물질사회를 변형시킬 수 있는 이상에 도달할 길을 열게 된 것이다.
"역사는 우리보다 상상력이 더 풍부하다."
칼 마르크스
루이가 명석하게 보일 때는 그가 해설하는 스피노자의 육체의 이론, 마르크스식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체제적 근간, 제국적 자본주의에 대한 기초설명에서이다. 그와 마르크스주의의 관계는 그가 스스로 설명하듯이 객체적, 즉 내재적이며 무의식적인 대상과의 관계다. 다만 회상의 매 순간 몰입하는 근원에 대한 고민, 사변적 기관이 어머니에 의해 암시되고 강요된 이중의 거리에 머무르면서 밀접한 접촉이 사라진 눈의 아이였던 루이 알튀세르는 '접촉을 갈망하는 변태성욕자의 갈증적이고 투영적인 욕구'가 연인을 살해한 결과로 나타나는 정신병자의 궤변처럼 들린다.
이쯤 되면 재미있어진다. 일부러 범죄의 흔적을 감추기 위해 쓴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진정한 사상이 갖추어야 할 기본 요소인 엄밀성, 일관성, 명료성을 단 한 번에 정신병리학적으로 한 곳에 몰아넣을 수 있는 집중력은 미셸 푸코가 즐겨 말했듯이 제조된 이념들로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층을 '닦아내기'한 구실을 한 셈이다. 모든 사람들이 제기한 정당한 질문은 이런 환각들의 투영이 루이 알튀세르의 철학 저서들, 철학적 토론이나 정치적 토론처럼 어떻게 완벽하게 객관적인 행동과 저작들로 귀착되었냐는 것에 대한 궁금증일 것이다. 루이는 집단적인 당이 아닌 인민개별의 공산주의를 위하여, 또한 어떤 상품관계도 없는 공산주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스피노자의 육체와 함께 하는 덕성과 힘, 육체 자체의 사고에 몰입하여 육체를 내 것으로 하고 재구성한 경험으로 내면의 일치감을 형성한다.
노쇠와 함께 경험하는 우울, 애정의 병적인 추구와 과대망상증, 열공탈장에서 기인된 마취로 인한 급성 우울증, 정신착란과 신경쇠약의 반복된 수십 년의 마찰은 루이와 엘렌의 결별을 의미했다. 든든한 버팀목의 여인에게서 버림받는 불안이 고조된 나날은 엘렌이 루이와의 관계를 스스로 끊기 위한 고독의 밀실을 만들거나 자살을 선언하는 약병을 늘어놓았던 시기였다. 아파트 안의 고독과 폐쇄 상태 속에서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루이와 엘렌의 둘만의 지옥은 결국 엘렌이 처량한 혀끝을 내놓았던 루이의 몽환적인 마사지로 운명의 시작점을 맞는다.
"존재한다는 행위는 하나의 본질적 행위이다."
고등사범 출신에 시대적 철학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이며 공산주의자로,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무척 뛰어난 여자와 결혼한 루이 알튀세르의 유명세는 아내를 교살한 사건이 불러일으킨 사회적인 파장에서 극대화된다. 정신력이 온전하지 않은 파괴적 우울증이 가득한 만성환자가 된 루이는 정신병원이라는 감금 속에서, 머릿속과 대화 속에서, 그 대단한 감옥의 '안전' 밖에서, 외부세계 속에서 무의식적인 상실, 내적인 대상의 상실, 사랑하던 존재인 엘렌의 상실, 정신력의 무의식적인 모체를 잃게 된다. 그것은 근본적인 구원의 불가능성을 루이 자신에게 증명해 보임으로써 자살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파괴하려는 욕망에 이르고자 했으며 상징적으로 타인들의 파괴, 무엇보다 가장 사랑했던 여자의 파괴로 나타났다. 그가 저지른 엘렌의 파괴는 스스로 설명하듯이 하나의 '애도작업'이자 자기 파괴의 작업, 자아 파괴에 대한 작업인 것이다.
"세잔은 무엇 때문에 생트 빅투아르 산을 매 순간 그렸겠는가? 그것은 매 순간의 빛이 하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이란 그 모든 비극에도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 나는 지금 예순일곱 살이다. 그러나 나는 마침내 지금, 나 자신으로서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에 청춘이 없었던 나로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곧 인생이 끝나게 되겠지만 젊게 느껴진다.
그렇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책 속의 알 수 없는 화자가 설명하는 소포클레스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한 민족의 역사나 마찬가지로 개인의 역사 속에서 최종적인 진리는 오직 죽은 다음, 죽은 사람이 더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그런 돌이킬 수 없는 종말 다음에야 알게 된다."
모든 것이 정리되는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한 의사의 이야기는 바로 루이 알튀세르가 깊이 묻어둔 본질의 목소리일 것이다. 나는 수많은 자살과 살해, 죽음의 뒷 이야기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와 해명을 들으며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는 급작스러운 죽음을 뒤로하고 한 개인이 혹은 조직이 계획적으로 의도하고 감행하는 죽음은 자연스러운 생의 흐름을 끊는 비일상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 죽음이라는 욕망의 실현, 보조자의 무의식, 주동자의 체념들, 그 모든 해석들을 하나로 응축하는 목소리는 존재에 대해 이렇게 마무리를 짓는다.
"어쨌든 나는 자네의 공개 해명을 자네의 애도와 자네의 삶에 있어서 자네 자신의 회복이라고 해석하네. 우리 선조들이 말했듯이 존재한다는 행위, 그것은 하나의 본질적 행위(actus essendi)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