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황소> 분노의 주먹
복서의 이야기는 투쟁을 연상시킨다. 투견(鬪犬), 투우(鬪牛), 투계(鬪鷄), 투마(鬪馬)... 끝없이 늘어지며 사각의 링 위에서 경주하는 도박. 스퀘어로 한정된 장터에서 역군이었던 소들 간의 쟁탈전은 농촌의 잎담배로 욕심을 피운다. 복서 이야기하면 역사적인 문헌에서부터 책과 영화를 거쳐 여러 작품과 인물이 떠오르지만 마틴 스코세이지(Martin Scorsese)의 <성난 황소 Raging bull>만큼 무덤덤한 감정이 화면을 지배하는 것은 없는 듯하다.
죄를 물을 수 있는 자는 눈을 뜬 자인가? "나는 누군가에게 돌을 던지고 있었지만 눈을 감고 있어서 알지 못했고 이제 눈을 떴다." 작품의 앞 뒤에 자주 사용되는 경구는 전체 문맥을 지배하는 효과적인 감상이 된다. 그래, 내가 돌을 던질 수 있는 건 눈을 감을 때뿐 눈을 뜬다면 어떻게 남들이 흘린 피로 즐거워하겠는가. 펀치를 날리던 성난 황소에서 마이크를 잡은 살찐 돼지가 되는 것은 늙어가는 통과의례인가, 아니면 세상에 동화되는 정신적인 성숙인가, 혹은 안방을 차지한 돼지들의 찌꺼기로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는 방편인 것인가.
서구인들에게 뿌리 박힌 원죄적 관념은 죄까지 동반자로 보는 민간전승 사회의 가치관에서 버겁게 느껴진다. 현재 자본을 쥔 사람들이 따르는 기준이 유대교 신앙이므로 인간의 분별심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사회화를 선언하면 종교를 믿어야 하고 길드적인 전통으로 변해가는 신앙은 험상궂은 무리들 사이에서 권력적인 몸매를 가진다.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지배적인 구조를 형성하는데 효과적이란 것을 알지만 종교까지도 생활 속의 시뮬레이션을 거쳐야 할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현대의 사회가 지방분권화 된 영주의 세력을 지지하던 분열된 봉건체제와 다를 바가 뭐 있는가. 가장 고귀하다는 가치들이 사람들의 손에서 변해가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반복된 역사까지.
권력과 돈, 인간관계에 집중한 실무형 인간들을 지켜보면 생각하는 것이 사무적이고 종교적이며 도식적인 것을 발견한다. 그들의 사상과 의식은 하나로 집결되어 있고 합의된 신념은 재차 분열을 두려워하는 듯 보인다. 자신이 내부에서 굳힌 신념을 검증하고 마음을 부리는 태도를 자주 점검하는 관찰이 중요하다. 타인에게 위해를 저질러 놓고 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비열하게 웃거나, 죽을 때쯤에 회개하면 천당이나 극락에 자신의 영혼이 안치될 거라 기대하는 우둔한 소치들의 상상력은 기가 막히다. 보디가드를 끌고 가서 거짓된 신학을 공부하고 온갖 잡탕으로 안팎의 정신을 더럽힌 구도자가 무슨 깨달음이 있는가? 자기가 무슨 원효인가? 마호메트? 부다? 예수? 모두 쓸어버리고 싶다. 그러나 그들이 사는 곳은 보이지 않는 늪이다. 함께 발을 들여놓으면 나도 소리 없이 빠져들 테지. 분노가 실없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지만 완전히 사그라들 때는 언제쯤 일지 모르겠다. 나도 스탠딩 개그를 해야 하는가? 소질이 전혀 없는데...
2005. 4. 21. THURSDAY
죽음이 가까워지거나 폭력의 말로에 접어들 때 인간들 내부에서 폭발하는 광기에 놀라곤 한다. 손을 꽉 쥐고 터져 나오는 고함은 결코 아름답지 않으며 초라하고 시기 어린 날카로움이 풀 죽인 질투의 칼날을 세우고 길게 손톱 밑을 파고든다. 어두움과 황홀함, 폭력과 환희, 허무와 재생. 순환하는 세계에서 선명한 것은 눈을 감고 단단하게 들이박는 분노의 주먹일 것이다. 아직까지도 예고 없이 무너지는 세계에 익숙하지 않다. 흑백의 천연한 흐름이 바닥에 고인다. 종이 울릴 때까지 잠시만 누워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