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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L WITH A PEARL EARRING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추억의 원형

by CHRIS
[Girl with a Pearl Earring, Johannes Vermeer]


부드러운 바람이 창을 넘어서

순수한 저 눈빛을 사로잡는다

거실에 걸친 빛은 어디 갔는가

소담한 진주색의 귀에 얹혔네

어여쁜 아가씨여 어디 보는가

그토록 그 누구를 사로잡았나


물의 나라에서 적었던 그림에는 남모를 체취가 숨어있다. 거미줄에 걸려든 파리는 한없이 촉촉한 입술을 바라본다. 너를 남김없이 그리려면 무엇이 가장 필요한 걸까? 빛과 색과 방탕을 섞은 시린 물방울? 본능적으로 대상에 헌신하는 천부적 소질? 울트라마린, 아리비아 고무, 와인 스킨, 공작석, 아마인유, 막자로 갈아버린 나약한 정신. 위대한 화가에게 남은 건 눈에 머문 그림뿐, 허무하도록 아름다운 그림뿐이네. 피터 웨버(Peter Webber) 감독의 동명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Girl with a Pearl Earring 2003>를 보면서 나직한 실소가 흩어졌다. 거미줄에 걸린 파리신세는 피사체만이 아니라 피사체를 그린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얽어매는 이도 모르게 빠져버리는 것이 미궁 속의 세상이다. 우린 이름 모를 슬픈 곤충들.


2005. 4. 2. SATURDAY



아름다운 이야기는 읽는 자체로 아름답다

아름다운 여인은 그 모습으로 아름답듯이

그림에서 영원히 시들지 않을 아가씨처럼


현재에 드러나지 않는 갈증은 과거에 스친 가벼운 그림 속에서 샘솟곤 한다. 어느 한 곳에 그림이 자리하고 있으면 그 풍경이 지나간 시간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던 순간으로 이동한다. 종이 귀퉁이에 한 줄로 짤막하게 남겨놓았던 기억의 되새김은 문구를 눈으로 어루만지는 순간 뜻하지 않은 연상을 불러온다. 귀걸이는 유일하게 즐겨하는 장신구이다. 존재를 인식하지 않을 정도로 조그맣게 한 자리에 머물러 영롱한 빛을 반짝인다. 삶의 귓전을 때리던 화려한 수술은 세월을 따라 하나둘씩 떨어져 버리고 동그란 추억의 원형만이 덩그러니 귀를 꿰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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