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알튀세르 《사실》, 이미지와 사유에 덧붙여 추적되는 사실들
호르헤 보르헤스(Horge Francisco Isidoro Luis Borges)의 단편모음집 《픽션들 Ficciones》과 대비되는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의 자서전 《사실 (원제: 사실들의 추적 Suivi de Les Faits) 1976》은 둘 다 읽기를 미뤄두었다. 철학적 사유에 대한 파편들을 정리해 보자고 생각한 이래 작가 스스로 써 내려간 감정과 현실의 혼용물인 자서전만이 아니라 일어났던 사실을 결코 객관적일 수 없지만 객관적인 시선에서 바라보는 내부적 고백이 분리된 서술은 시대와 시간을 거슬러 외부에서 관찰하는 작업을 가미하면 그 의미가 난해해질뿐더러 시공의 경계선이 모호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벌어지는 '사실'은 진실로 말하기 어려운 주제이다. 사관(史官)들이 가감 없이 적은 시대의 역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의 기록처럼 한 개인이 현상학적으로 삶에서 만나는 순간들은 감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도 수사학적으로 묘사할 때는 기억의 퇴화와 함께 현장을 미화하는 글쓰기라는 구술적 장치를 통해 현실과 다른 언어를 끌어낸다. 각자의 삶이 가지는 해석의 시점은 다중의 선율을 추종한다. 사건을 묘사하는 하나의 글들은 시간의 일직선에서 방사형으로 무한하게 확장되어 뻗어간다.
출장이 잦아지면서 지난 한 달 동안 비행기에 실어 나른 픽션들과 사실들은 무엇이 가공의 산물인지도 알 수 없게 사실과 허구의 중간에서 머리에 입력되는 이미지를 면밀하게 관찰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안구 주변을 누르며 피곤함을 호소하는 육체와 정신의 시달림은 서술적 신호를 간헐적으로나마 중단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시력이 퇴화되어 뿌옇게 겹쳐지는 사물의 혼탁함이 육체적 한계와 젊음의 쇠퇴를 자연스럽게 알려주고 있다.
시간을 거슬러 파편으로 튀어나오는 감정을 산발하여 적었던 글들이 내부로 갈무리되는 시점이 다가오면 지난 수십 년 동안 마찰했던 외부적 삶이 나의 정신세계와 예술적 형상의 교착점에서 어떤 작용을 하였는지 사실과 픽션을 분리한, 혹은 교차한 중간자적인 목소리로 기술해보려고 한다. 하나의 그림자로 남은 감정의 지도를 엮기 전에 타인이 읽을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하는 작업은 창작적 세계의 발현을 위한 연습인 동시에 연대의 공간에서 육체가 사라진 후에도 영혼의 공명을 울리며 시간을 거슬러 존재를 인식하는 친절한 안내서가 될 것으로 믿는다.
"죽음의 냄새, 죽음의 언저리에서 바닷가에서 입을 다물듯이 두 사람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사랑했을 것이다."
루이 알튀세르의 《사실》에서 발견한 사랑과 교차된 죽음의 인상적인 서술이다. 창문 밖에서 바라보는 타인의 삶은 전혀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눈꺼풀이 떨리고 입을 움직이고 두 손을 마주 잡고 초초하게 거실에서 서성이는 당신을 바라본다. 마임을 연주하듯 무용하는 감정적 동작을 조용하게 관찰한다. 자서전이 육성으로 머리를 강하게 뒤흔든다면 사실의 묘사에서는 인물들의 행동만이 두드러진다. 한 문장으로 서술되는 죽음은 살아있는 우리 모두에게 통용된다. 죽음과 사랑까지도 한데 어우르는 에로스적인 하데스의 음성은 강렬하다 못해 언제나 충격적인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동양권에서 '4'는 불길한 숫자로 인식되곤 한다. '4'라는 숫자는 엘리베이터를 탈 때 대부분 가려져 있다. 죽음과 같은 발음인 사(死)는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Night of the Living Dead>의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다가온다. 한국시간 2025년 4월 4일 오전 11시 22분에 선고된 대통령의 파면은 흥분된 느낌표를 달고 한 시간 후의 미래적 숫자를 표기하며 카톡으로 전해졌다. 중국에서 열리지 않는 포털사이트의 뉴스는 한국으로 돌아와서야 자세히 읽어볼 수 있었다. 죽은 자를 기리는 명절이었던 청명(淸明)에 작업 도안을 배치하면서 우리가 더 이상 기념하지 않는 4월 5일 한식(寒食)이 동지로부터 105일째 차갑게 누운 봄을 밝히는 과제임을 상기했다.
"한 테두리 안에 계속 남아 있으면서 어떻게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는가를 아는 것이 결국 모든 철학적 그리고 정치적, 군사적 문제들의 과제이다."
알튀세르가 언급한 사실과 진실을 파헤치고자 하는 역사의 과제들은 흥미롭다. 후설과 마르크스, 헤겔은 개인들만 있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인간적 인물이 존재하는 사회주의의 재생과 순환을 강조했다. 자본주의 세계의 찬란함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옳고 그름을 말하는 끝에서 모든 것은 정반대로 말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삶의 기준을 삼는 절대적인 윤리의 대척점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참고할 관념들이자 실행적 도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현재의 우리들에게 불행한 과거를 지나 불완전한 현재를 거쳐 미래를 지속하기 위한 온전한 진실을 밝히는 작업은 무엇일까? 상황을 개선할 노력과 해결의 원리를 찾아냈다는 사실로 현재를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여기며 공간의 감옥 밖으로 나오지 않는 고집세고 억센 마음은 어떻게 떨쳐내야 할까? 머신 러닝이 증폭하는 양자역학의 시대에 기계적인 사고를 넘어서 자유와 공명의 사유가 공존할 수 있을까? 생각에 몰입하다 보면 철학을 다루는 사람들이 달걀 비린내가 나는 날 것과 같은 성(性)에 몰두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문장 구조에서,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에서 저속함조차도 실없게 날리는 우울과 만나면 한편으로는 끝까지 유약한 표정을 읽으며 그들을 조소하고 싶은 욕구가, 다른 한편으로는 읽기를 중단하고 답답한 머리에 바람을 쐬러 거리를 한 바퀴 산책해야 할 것 같은 불편함이 치솟는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들은 두세 번쯤은 흥미롭다가 열 번이 넘어가면 지루하다 못해 심사가 뒤틀린다. <그때 그 시절>이 황금기인 것처럼 회상할 때마다 그 기억이 나의 현재를 얽어맨다면 그만하라고 고함을 치게 된다. 귀가 먹은 그들은 쉼 없이 같은 말을 반복한다. 들리지 않는 귀를 피해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찬 바람이 시원하다. 알튀세르가 서술한 사실들은 대부분 그러했다. 서둘러 마무리해야 할 구시대의 연민은 보존할 가치가 아닌, 낡은 세대 스스로가 죽음을 통해 해방될 수 있는 종말로 향해야 할 것이다. 움켜쥐고 자리를 놓지 않는 아집을 바라보며 횡단보도 앞에서 마주친 지난 삼월의 희끗한 머리들의 논쟁적인 서명들이 씁쓸하게 뒤엉켜왔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뒤덮던 이념적 시절은 실질적인 현재와 결별하였기 때문에 틀에 박힌 관념을 논하는 것 자체는 더 이상 의미롭지 않다. 그저 루이 알튀세르라는 한 인간이 프로이트의 심리분석을 사용해 분열된 스스로를 다층적으로 관찰하고 해석하는 시점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철학적 관점에서 혹은 광인의 관점에서 글쓰기를 어떻게 실행할 수 있는지 점검하는 게 책 읽기의 목적이 되었다고 말해야겠다. 나는 수면에 묻힌 생활의 이면이 고통스러웠던 사실로 인해 현실과 무관한 이론적인 태도에 정신적인 형상을 포함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작업하는 자가 되고 싶다면 무성의 인간으로 탈피하는 과정에서 현실적인 작업을 실행하고 내부적인 의식의 참여를 독려하는 예술적인 목소리를 낼 준비를 해야 한다.
인위적인 기교와 아버지의 아버지, 환상과 영상들이라는 하나의 주제와 여성의 성, 남자를 만나기 이전의 어머니, 처녀의 이미지인 심연의 여성, 무성의 순수한 정신의 어머니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루이 알튀세르의 심약한 분열은 내가 삶에서 만난 아버지의 아버지들에게 발견하는 연민과 증오, 사실적 억압과 분별의 어리석음, 착오와 반복적 실수에 대한 한탄과 더불어 역시 어머니의 어머니들에 대한 연민과 증오, 육체적 기능의 상실에 대한 슬픔과 피해 갈 수 없는 시간의 망각이 전하는 한숨 속에서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주제이다. 누군가 나에게 지나간 사실들에 대해 질문하고 만약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반드시 해야만 한다면, 본연에 가라앉은 사실은 견딜 수 없도록 침묵하기 어려울 것이기에 그 또한 스스로 결자해지를 해야 한다는 반복되는 강박이 엄습하여 루이 알튀세르의 《사실》을 빌어 삶에서 추적되는 사실들을 덧붙이는 이 글을 적는다.
"모든 인간이 철학자임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데올로기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통합시키기 위한 철학적 작업의 결과인 뜻밖의 철학적 발견들의 영향을 받은 하나의 이데올로기 아래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배계급에게는 이 통합을 담당하는 직업 철학자들의 존재가 필수적이라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서 결국 철학적 범주들이 과학적 실천 속에서 형성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어떤 과학도, 수학 자체도 지배 이데올로기 밖에서, 그리고 지배 이데올로기를 통합된 이데올로기로 성립시키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는 철학적 투쟁 밖에서 전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들의 추적, 루이 알튀세르 Suivi de Les Faits, Louis Althusser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