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LETRAL, 21 GRAMS LIFE

<콜래트럴> 시간의 평행선을 달리는 동반자 인생, 내 영혼의 무게.

by CHRIS
[COLLETRAL, MICHEAL MANN. 2004]


한때 영화를 보고 나면 의무감으로 감상을 썼다. 보고, 읽고, 듣고, 받아들였던 것들을 엉성한 거름망으로 거르듯이 한 편의 글로 졸여냈다. 그렇게 삶도 잼처럼 냄비 바닥에 끈끈히 졸여진다면 극적이지 않을까. 도파민을 자극하고 생각을 흔드는 영상은 육체로 실행하기 어려운 욕구를 재촉하며 머릿속을 누비곤 했다. 그런데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을 넘어가며 시간은 무심히 하이톤의 습관마저 바꿔놓았다. 오직 그 길 밖에 없을 것 같던 필사적인 몸부림도 인간의 고집 앞에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텅 빈 영화관에 누워 책을 읽듯이 인생의 책장을 넘기던 취미도 심드렁해졌다. 찜질방에서 틀어주는 영화 한 편 보기도 버겁고, 비행기에서 멍 때리는 영화 한 편도 보기 힘들다. 무엇에 그렇게 지쳐버린 것일까. 줄줄이 이어지는 말들과 어지러운 화면은 화려한 배경이 되어 흘러갔다. 호텔방에서도 집에서도 최신식으로 즐비한 감상 리스트는 어린 시절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주말의 명화를 손꼽아 기다리던 그날들만큼 설레지 않다.


분명 일 년 전의 나도, 십 년 전의 나도, 이십 년 전의 나도, 삼십 년 전의 나도, 사십 년 전의 나도 그리고 이 땅에 태어나서 갓 울음을 터뜨린 나도 나일 것이다. 그러나 흘러간 기억을 더듬어보면 물 한 모금에 체하고, 종이 날에 불현듯 손가락을 베이듯 살갗을 뚫고 올라오는 기억에 가슴은 따갑도록 멍울이 진다. 이렇게 평이하고 담담하게 속을 털어놓는 것도 다른 이들을 신경 쓸 여유가 없어서일 것이다.


2004년 10월 16일 토요일, 어느 시월의 기억을 만지작거린다. 이십일 년 전 영화는 감상과 달리 같이 보았던 사람도 그 안의 내용도 그렇게 기억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고서 바라보는 나는 내가 아니다. 휘몰아치는 기억 또한 표류한다. 깊게 침잠한 죽음의 무게를 공기 중으로 가볍게 날려본다. 그리고 떨어지는 가루를 수면 위에 풀어본다. 먼지가 되어 흩어지는 영혼의 무게는 멀어져 간다.




<21 GRAMS> 2004. 10. 16. SAT. <21그램, 영혼의 무게>

영화 <콜래트럴>을 보기 전에 예고편을 봤다. 베네치오 델 토로의 무심하고 멍한 눈빛이 폭발한다. 못된 스내쳐처럼 트래픽 쨈을 던지며 한 서스펜스를 부린다. 숀 펜은 칼리토의 냉혹함을 벗고 데드맨의 워킹을 끼익 거리며 온다. 곧 미스틱 리버 같은 웃음을 흘린다. 나오미 와츠는 멀홀랜드로 드라이브도 시켜주고 괴기스러운 링을 껴대며 프랜치 키스를 던진다. <21그램>, 이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 예고편이었는데, 21그램이라는 무게에 꽂혀버렸다. 21그램은 인간이 죽을 때 누구나 상실하게 되는 무게라고 한다.


복수의 무게인가? 사랑의 무게인가? 나의 무게인가? 너의 무게인가? 죄의 무게인가? 모두가 가진 영혼의 무게인가? 모습도 다르고 하는 행동도 틀리고 생각도 다르고 삶도 다른데 육체 속에 든 영혼의 무게는 다 똑같은가? 니켈 몇 개. 오 센트 몇 개. 십 원짜리 동전 몇 개. 초코바 한 개의 분량. '칼로리 바란스'바나 맛동산 몇 가닥 겹치고 색색의 수수깡 몇 다발 겹쳐야 하는 무게.


왜 이렇게 이 말이 안 잊힐까? 영화에 대한 궁금증보다 영혼의 무게라는 말에 아직도 기분이 성성하다. 성(性)도 다르고 삶도 다르고 현재도 다른 영혼들인데 무게는 같다면 삶의 경중에 대해 판단은 어떻게 할 것인가. 미래는 어디에 놓일 것인가. 과거는 어떻게 지울 것인가. 어떻게 삶을 끌어갈까. 질문에 대한 답은 어렵고도 힘들다. 무엇을 일생의 소원으로 꼽아가며 이 어질러진 삶을 키워나갈지 고민이 된다. 21그램이 흔들린다. 그런데 내 영혼의 무게는 21그램이 아닌 거 같다. 많이 흔들대는 거 보니 좀 모자라거나 넘치는 듯하네.



<콜래트럴 COLLATERAL> 2004. 10. 16. SAT. 저당 잡힌 시간의 평행선을 달리는 同伴者人生

사람들은 어떤 계기로 영화를 보게 될까? 잡다한 영상의 기억 속에 몸을 담고 살면서 영화가 취미며 생활이 되고 생각의 늪이 된 나는 언제부턴지 알 수 없게 이곳에 단단히 못을 박았다. 장도리로 빼버리기엔 너무 깊이 들어가 버렸다. 날 돌보지 못한 시점부터 취미 찾기도 쉽지 않지만 잘나지도 못한 이 몸을 담보 걸고서 타인의 삶을 결정해야 하는데 어떻게 나만을 그리면서 살겠는가. 그래도 발악하듯 낡고 녹슨 기억의 다중파 무비 채널을 돌리며 온갖 감정의 삶을 팽팽하게 뽑아본다.

그런데 오늘은 이 간극을 깼다. 오랜만에 현실에서 밤을 달리라고 친구가 콜래트럴을 선사한 것이다. 저녁 9시부터 응시한 마이클 만의 시선은 <라스트 모히칸>, <인사이드>, <히트>, <알리>의 액션과 드라마처럼 <콜래트럴>에서도 역시 배반치 않았다. 끈질기게 삶의 코드로 다시 한번 눈을 찔렀다. 이번엔 도시의 야성을 트레이닝시키며 다면적인 인간성에 대한 프로이트식 질문을 해댄 것이다.

그렇다고 검은 안대를 쓰며 속아 넘어가겠는가? 천만이다. 토마스 만처럼 만연체로 길게 깔아 논 복선은 파우스트와 메피스토 형제처럼 선명하다. 심판자는 선(善)과 악(惡)을 양분하기 위해 한 명의 백인과 한 명의 흑인을 등장시켰다. 흑과 백의 바둑알이 던져진다. 자, 한수 놓으실까? 그리고 그들을 이어 줄 한 명의 여자 검사를 등장시켰다. 승패를 잘 조율해 보라고 말이다. 여자는 같은 동족에게 흔적을 남긴다. 명함을 건네고서 자신은 이 사건이 결정적일 때 나타나겠다고 말을 해 버린다. 역시 간사하다. 왜 여자는 자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가. 아, 여자가 판단을 좌우할 신(神)이라는 건가?

신이라니 엄숙해진다. 자, 분위기 쇄신이다. 잠시 재즈의 합주를 시도해 보자. 재즈의 거장 마일즈 데이비스를 초청해 보는 거야. 심호흡하며 떨지 말고 악기를 울려본다. 하지만 너무나 초라한 인생이기에 정말 쿨한 그 남자와 함께 평행봉에서 트럼펫을 불 수 없다. 비실하게 웃으며 다음을 기약한다. 데이비스? 내 거절의 표시가 아직 인간이 덜 됐다는 신호임을 안다. 그럼 준비가 되면 다시 합주하자는 말을 남기고 먼저 떠나간다. 그래, 우리는 겹쳐질 수 없어. 빵!

왜 이렇게 리볼버의 총은 각종 피맛에 취해버리는가. 스패니시 아파트먼트에 묵고 있는 놈을 유리창 너머로 패대기치고, 스카이 빌딩에서 계단을 내려가는 놈을 그 자리에서 한 방에 거덜내야 속이 풀리는가. 인종의 용광로에 묵혀진 LA의 밤은 열정도 피 버리는 행동을 담아낸다. 하지만 난 잘못 없다. 똑같은 위치로 익숙하게 쏴대는 총놀림은 모든 이에게 이 몸이 훈련된 인종청소기라는 걸 미리 경고했어. 하지만 어리석은 인간들은 춤추고 술 마시며 환락의 밤을 보낼 뿐 경각의 목숨이 총구 앞에 놓여있는 것조차 모른다.

모두가 바보 같은 자식들이다. 근데 별난 놈이 하나 있다. 거리를 스치는 억 만개의 먼지별을 쓸어 담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가 이곳에서 날 알아봤다. 얼굴 앞에서 알짱거리는 파리가 아니고 엉뚱하게 로스를 구워대는 LA에서 고용주의 택시를 모는 그는 단골 위주로 휴양지 같은 리무진을 끌겠다는 멍청한 몽상에 사로잡혀 몰디브 사진이나 자꾸 쳐다본다. 할부금이나 연금보험, 처리할 집세 때문에 엄마 뱃속에서 생을 담보 잡혔던 그 검은 얼굴이 백미러를 통해 나를 본다. 얼굴색은 다른데 쳐다보는 그 눈빛은 왜 이렇게 나와 비슷한 것일까. 그의 눈에 비친 동물들을 바라보는 황폐한 떨림을 보자 하니 그 또한 나와 같은 선율을 질러댄다.

검은 도로 위를 가르는 승냥이의 기이한 야광 눈빛은 흑백 논리를 넘어서면 모두가 쳐다볼 수 있다. 그러나 잠자는 사람들은 오늘 밤 도로 위에서 죽어버리는 게 사슴일지 승냥이일지 미친개일지 관심 없다. 검게 도배된 곳에서 안락하고 있는데 무엇이 어둠이고 무엇이 빛인지 털끝이라도 관심 있겠는가? 램 수면의 깊은 유혹에서 벗어나지 않는 걸. 그저 간헐적으로 자신을 누르는 가위눌림에만 깰 뿐이다. 타인의 소리가 죽음을 향해가도, 불거진 연기 속에 살이 타도, 눈앞에서 차에 치여도 보지 않는다.

가끔은 산타클로스가 오면 선물 달라며 착한 아이라고 아웅다웅거릴지 모른다. 하지만 산타를 끌고 다니는 피터 블랙이라는 사슴은 산타 몰래 나쁜 아이를 처리하러 발만 바쁘다. 하얀 눈밭에서 같은 배를 탄 이들은 언제나 함께 찾아오는데 왜 한쪽 면만 바라보고 손을 벌리는지, 포장 뜯는 와중에 나쁜 놈임을 간파한 블랙의 총 한 발에 영원한 어둠으로 떨어질 것을.

달리는 지하철은 많은 사람들을 싣고 내린다. 당신은 의자 옆에 앉은 사람들을 얼마나 오래 바라본 적이 있는가. 알 수 없기에 그 남자나 그녀는 그저 눈요기 감이지 튀지 않는다면 시선 불만족일 뿐이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나라고 남들에게 그런 존재처럼 보이지 않겠는가? 역시 전동차가 멈추면 우르르 내려버리고 남은 자리에 이미 쓰러져 잠들어 버릴지 모르는데.

내가 타는 지하철, 택시, 버스, 머무르는 건물, 백화점, 음식점, 길거리... 이게 내 것이라고 소리칠까? 아니, 모두 잠시 빌리는 것이다. 몸이 사는 동안 껍질 채 빌렸으면 죽을 땐 도로 내주어야 한다. 그래야 현재가 썩어버리고서 내일을 향해 날 수 있다. 붙잡고서 간다면 총성만 가득한 세상에서 귀만 먹을지 모른다. 그래서 난 오늘과 어제의 시간을 조심히 뼈에 새긴다. 썩을 살과 눈에는 세상을 담았다 지운다.

<콜래트럴 COLLATERAL>을 보고 나오면서 친구가 그랬다. 예전엔 돈을 내고 영화를 보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이다. 그런데 자신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은 영화를 취미로 삼은 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물론 이것도 추억이 되었다. 하지만 누군가에 대한 기억과 지나버린 시간과 그리고 그것을 떠안고 사는 현재는 <콜래트럴>, 이 영화 제목처럼 시간의 평행선을 달리며 과거와 미래를 끌어안는다. 현재를 담보 잡고서 예고 없는 시간을 당긴다. 보이지 않는 시선에 갇힌 사람들과 지워진 이야기를 도르래로 밀어 올린다. 그게 우리가 그리는 담보 잡힌 시간의 평행선을 달리면서 기억해야 할 동반자의 모습일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며 이 대사가 생각났다.

"살아남으면 그녀에게 전화해... 인생은 짧은 거야... 덧없는 거야..."

집으로 오면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각박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긴긴 통화를 하다 보니 밤이 다 새 버렸다. 조용한 소리를 내며 나의 일기장에도 전화를 걸어본다.

"나야. 살아남으려고 전화했다. 인생은 짧다더라... 덧없는 거라데... 어젠지 오늘인지 지하철에서 죽어버린 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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