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일상의 흔적으로 걸어놓았던 습관을 다시 꿰려고 하니 자꾸 초점이 어긋난다. 원래 자리에서 벗어나보면 본래 자리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삶에서 크게 의미 없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모른 체 할 수 없다. 여전히 살아있는 현재는 중요하다.
올해의 계획이 세워지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기 무섭게 바라지 않은 일들이 겹치게 되었다. 일이 밀려드니 잠만 쏟아졌다. 가야 할 길이 보이지 않고 왜 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던 시간들이 밀려들었다. 쉽게 잡을 수 없는 시간은 경험으로 인지하는 탄력적인 이동을 통해 원래의 모습에서 멀어진다.
마음이 불편하고 분노에 사로잡혔을 때 쓰는 글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사로잡힌 감정에서 벗어나 어지러웠던 모습을 상기해 보면 이 목소리가 정녕 나인가 싶다. 차분하지 않았던 지난 감정들을 다독이면서 어지럽게 부유하는 생각들을 바라보았다. 이젠 무거운 봇짐이 가벼울 만도 한데 아직도 소소한 일거리에 몰두한다.
<문득> 2005. 10. 14. FRI. <당신이라는 Lyric> 中에서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쯤 당신에게 사랑이 가득 담긴 격려의 편지를 보내고 싶다.
이제까지 저지른 잘못 모두 용서하고 이렇게 살아온 것에 감사한다고 적고 싶다.
고생 많았던 한 해, 힘들다고 도중에 멈춰 서지 말고 함께 힘껏 달려가지고 말하고 싶다.
나는 매일을 욕지기가 오르는 이야기로 컴컴한 목구멍을 괴롭히고 싶지 않다.
나쁜 소식은 씹어 삼키고 구토한 기분은 갈갈한 웃음으로 변화시키고 싶다.
이기적일 수 있는 한밤에는 오직 자신만을 다독여도 괜찮을 거라고 위로하고 싶다.
이타적이어야 하는 한낮에는 배고픈 사람들과 지내는 것도 좋을 거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하루가 편안하여 잠으로만 한밤을 물들이고 싶지 않다.
내일에 대한 궁금증으로 등이 배겨서 이불을 뒤척이게 되고
많은 사람들과 뜨거운 기쁨을 나누고 싶어서 한바탕 신경질이 났으면 좋겠다.
행복한 기억이 정오의 빛보다 약한 우리에게 가슴이 애틋한 순간은 길지 않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자르면 왜 잘랐는지 물어보고
퉁명스럽게 “그냥.. 가을이니까”라고 내던지듯이 말하면
말없이 긴 단발에 가린 눈을 응시하는 사람 곁에 앉고 싶다.
우리의 말은 가벼우니까 어둠이 내리면 침묵하는 사람에게 가만히 기대고 싶다.
관심이 없으면 가볍게 던지는 안부조차 진심일 수 없기에
봄날의 꽃가루처럼 손에 담기 어려운 새벽인사를 건네거나
가을날의 낙엽처럼 아스라이 부서질 웃음을 입가에 지어본다면
옆집 할머니처럼 환하게 받아주는 사람과 두 눈을 마주치고 싶다.
나의 왼쪽 귀걸이를 치고 다시 오른쪽의 귀걸이를 치고 가는
저 한줄기 미풍 같은 사람과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싶다.
자신의 감정에 도취되어 분노로 차갑게 식어가는 모습을 잊어버리는 자만심은 버리고 싶다.
간혹 남의 말을 엿보며 자신을 점검하는 타인들의 저 평범한 되새김 속에서
그만의 아우라가 가득한 사람과 풋풋한 정을 나누고 싶다.
또래의 사람들이 한 몸뚱이에서 떨어져 나간 물고기 비늘조각처럼 웅얼거릴 때
바다처럼 넓고 깊은 마음을 가진 사람과 세상의 모든 물고기를 안는 고민을 해보고 싶다.
나는 저녁에 들어와 밥투정을 하지 않는 사람과 밥을 먹고 싶다.
자신의 입맛이 중요한 만큼 상대방의 기호가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과 식탁에 앉고 싶다.
허겁지겁 먹든 잠을 자면서 밥알을 씹던 반찬이 하나던 건강식이 아니던
덜 먹어라 더 먹어라 재촉하지 않고 이렇게 차려먹으면 법도가 되냐고 뭐라 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놓인 밥이 있음을 즐기는 사람과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
내 인생이 나와 당신의 드넓은 세계를 발견하는데 노력하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허물을 볼 때는 두 눈을 뜨고 당신의 허물을 볼 때는 한 눈을 꾹 감았으면 좋겠다.
당신이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 반잔 정도는 나를 위해 남겨두어
목마른 밤, 내가 당신의 식은 커피를 마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따뜻한 언어를 불어넣을 수 있게…
우리의 인생이 의무감으로 살아가거나 형식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상대에게 관심을 가지고 아끼는 인생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가을이 무르익었으니까 나에게 집중하기.
그리고 당신과 나누기.
나눔의 계절, 가을.
그 한복판에 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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