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TTE DES LEBENS

《삶의 한가운데: 가장 좋은 세월의 철학》 인생의 중턱에서

by CHRIS
[FISH WAVE: Swimming Against the Current] Photographed by CHRIS


인생의 절반을 지나면 누구나 철학자가 될까


종(種)의 이름이 같아도 생김과 습성이 다르듯, 인간의 내면은 각자의 목소리로 울린다. 바르바라 블라이슈의 《삶의 한가운데: 가장 좋은 세월의 철학 Mitte Des Lebens: Eine Philosophie der besten jahre by Barbara Bleisch》의 한국판 제목은 《인생의 절반을 지나면 누구나 철학자가 된다》이다. '삶의 한가운데'라는 익숙한 원제를 보며 십 대 시절 존재의 충격을 가져다준 루이제 린저(Luise Rinser)의 소설, 《생의 한가운데 Mitte Des Lebens》가 떠올랐다. 알 수 없는 내일에 대한 시간적 충만이 가득했던 나는 생의 한가운데에 서면 까마득한 절벽일지 황금빛 석양일지 상상하였다. 바야흐로 백세 시대, 인생의 절반을 지나면 누구나 철학자가 되는가.


나이가 많아지면 현명해진다는 말에는 회의적이다. 간간히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세상사를 들어보면 점잖지 못한 나이 든 사람들의 정치적 대화와 실없는 교양과 심사를 해소하지 못하는 오락은 나이를 먹고 철이 드는 것이 별개라고 설명한다. 글을 짓던 그림을 그리던 노래를 부르던 밭을 갈던 싸움을 하던 삶의 스타일은 지나온 생의 흔적에 따라 각자 다르게 진행된다. 멋진 결론이 날 것만 같던 충만한 기대도 실제의 결승점에선 통과의례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인생의 초창기든 절반이든 종착역이든 이십 세와 삼십 세와 사십 세와 그리고 오십 세의 정수는 현실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일갑자가 되는 육십 세가 되어도 칠십 세와 팔십 세와 구십 세와 백을 꽉 채워도 종결점에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처량한 한숨은 땅 속으로 푹 꺼져버릴 것이다. 한 세대가 끝나면 생각하는 존재는 익숙함으로 물들고 다시 헐어지고 낡아지고 소멸되고 흩어져서 다른 흐름이 대체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매한 자세로 시간에 걸쳐진 나는 윤하의 [스무 살 어느 날],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양희은의 [내 나이 마흔 살에는]의 가사를 되뇌며, 잉게보르크 바흐만(Ingeborg Bachmann)의 《삼십 세》에서 유예된 시간이었던 삼십 세의 젊고 괴로웠던 날들을 떠올리거나 중년에 창작 의욕이 한풀 꺾였던 작가들의 오십 세를 말한다.

"누구나 겪는 세월 앞에서 나만 초라한 건 아니란 말이지."

이런 허장성세는 그저 대중문화에 길들여진 탓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시간의 무게는 누구나에게 다른 강도여도 여지없이 약해진 몸을 짓밟고 가니 말이다.


인생의 절반


오십은 잠시 정지된 시간이다. 좌측이나 우측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봉우리에 선 균형은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유선형으로 오르내린다. 아주 먼 곳에서 인간을 바라본다면 검은 한 점으로 표현될 것이다. 존재의 초점과 떨어진 시간은 가늠하기 힘들고 각 점의 진위도 알기 어렵다. 외모의 변화는 시간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아름다웠고 싱싱하던 모습이 나이 듦과 함께 무덤덤한 감흥으로 다가올 때, 무엇이든 해낼 것 같은 흥분과 무모한 도전은 영원할 줄 알았던 시간의 무지가 되어버린다.


글을 읽으며 드는 생각인데, 조용히 타인의 생각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도 습관인가 보다. 문장 하나에 튀어나오는 생각이 한 무더기이다. 인생 절반에 도달해서 아직까지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에 열정이 있고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것에서 기쁨을 느낀다면 새롭게 시작하는데 장애는 크지 않다. 우리가 새롭게 시작할 수 없는 이유는 나이에 걸맞게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타인의 이목을 따지는 두려움 때문이다. 모든 것은 개인적인 의지와 상관없이 시나브로 진행된다. 다행히 나는 살아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이루어질 것은 세상 뜻대로 이루어지리라.


지금과는 다른 삶이 있다면 그 세계를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어느 날 갑자기' 바닷가 별장과 교양 있는 남편과 평온한 자신의 삶 모두를 한동안 떠났다가 다시 떠나가기 전의 그 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까? 집을 떠나 있던 시간에 대해 함구할 자신이 없어진 나는 마그리트 드 무어(Margriet de Moor)의 소설 《처음엔 회색, 그다음엔 흰색, 그다음엔 파란색 Erst grau dann weiß dann blau》을 생각의 바다에 칠해보았다. 과연 삶은 회색이었다가 백지처럼 하얬다가 그리고 물빛처럼 파래질 것인지 궁금해졌다. 나의 삶은 싱그런 초록색에서 암담한 검은색으로 그 색이 바랬다가 돌연 짙은 핏빛이었다가 지금은 다시 무채색으로 변하고 있다. 모두를 섞으면 검어질 것이고 빛에 날려 보내면 하얘질 것이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읽지 않은 소설의 결말을 막연히 떠올렸다. 곧 알 수 없는 현재를 떠나간 여자를 그리워했다. 체력이 달리는 것을 제외한다면 변덕스러운 기호의 성향상, 육체적 열정을 앗아갈 연하의 연인에게 홀랑 마음을 뺏긴다던지 자식이나 남편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가 인생의 목표가 없어져서 허무함에 삶을 놓는 중년의 위기에 허우적댈 확률은 적을 것이다. 그러나 중년이라니, 한숨을 내쉬며 누구나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곡선을 그려 보았다. 나에게 앞으로 계속 가는 것 빼곤 돌아설 자리는 없다. 여름이 지나 갑작스러운 겨울이 닥치듯 급작스레 닥칠 죽음은 항상 생각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과 죽음과 존재의 엇갈림은 두려움과 실존 사이에서 절묘하게 움직인다.


"죽음은 모든 재앙 중에서 가장 두렵고 떨리는 재앙이지만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는 죽음이 우리 곁에 와 있지 않고, 죽음이 우리 곁에 와 있을 때는 이미 우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산 자들과도 죽은 자들과도 관계가 없다. 왜냐면 살아 있는 자들에게는 죽음이 아직 오지 않았고, 죽은 자들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에피쿠로스 Epikur, Brief an Menoikeus, in: ders.: Briefe, Sprüche, Werkfragmente Übersetzt und herausgegeben von Hans-Wolfgang Krautz, Stuttgart: Reclam, 41-51, hier: 45》


우리는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실제 죽음의 순간과 자기 존재는 결코 만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경험하지 않은 자기의 죽음에 대하여, 이미 경험하였고 지금 경험하고 있는 늙어감과 이별에 대하여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고통의 강도를 대입하고 측정한다. 타인의 죽음은 상상하고 있는 자신의 죽음과 다르다. 죽음은 언제나 상대적이며 본질적인 나의 죽음과는 외떨어져있다. 영원한 미래를 그리는 의식 속의 젊은 나는 박탈감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하여 영원히 앗아갈 수 없는 지금의 나와 미래의 죽음이 만나는 것을 이토록 증오하고 있다. 죽음은 결국 ‘지금-여기’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다. 유한을 깨달을 때, 삶은 비로소 무한의 방식으로 확장된다. 우리가 소멸과 생성에서 만나지 아니한다면, 끝과 시작은 어떤 얼굴로 시간 앞에 놓여있는가.


"후회 없이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보다 더 나은 답은 "후회 없이 살았다"라는 자신의 평가이다. 지금도 놓쳐버린 기회와 선택할 기회 사이에서 실패가 가득한 나는 아직도 하고 싶은 것이 가득한 현재를 실감한다. 지나버린 것을 아쉬워할 때는 미련과 후회가 가득하며 과거를 잡기 위해 뒤를 돌아보게 된다. 과거는 현재의 나를 만든 시간이기도 하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과거가 현재를 붙잡고 내일로 가지 못하게 해서는 안된다. "새로운 시작을 하기에 늦은 나이는 없다"라는 말은 이미 거친 폭풍우가 가득하다는 것을 평온한 바다를 바라보며 이해한 오늘에서야 더 공감하게 된다. 모든 일에 숙달하고자 한다면 지속적인 연습과 꾸준한 시간과 의식의 개입이 필요하다. 지금부터라도 높은 봉우리에서 내려오는 연습을 하려고 한다. 돈을 벌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옷을 만들고 영상을 찍던 일들을 계속하는 거다. 후회 없는 선택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선택의 고민 앞에서 조금 더 과감해질지 모를 일이다. 현재의 결정이 바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바꿀 수 없는 것은 무엇일지 아무도 모른다.


인생의 중턱에서, 나이 듦에 대하여


인생의 중턱에 다다르니 남자 두 명과 여자 셋을 능가할 체력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되었던 젊은 시절은 이미 지나갔음을 체감한다. 일찍이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하는 부모님을 돌보면서 욕망을 담고 있는 육체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몸을 직접 놀려 무거운 것을 들 시간에 타인의 체력을 돈으로 사는 것이 '신체유지보수(Body Maintenance)'에 더 유익함도 느끼고 있다. 노쇠해진 육체적 힘에 의지하여 힘들게 살지 않기 위해선 타인의 노동력을 살 돈이 필요하다.


깊게 새겨진 이마의 주름은 현명함의 상징이 아니라 보톡스를 맞아야 할지 아니면 자연 노화의 과정으로 남겨둘지 선택하는 현대적 노화의 딜레마이다. 동갑내기 배우들의 모습에서 어색하게 팽팽한 이마는 쁘띠 성형의 공로이다. 바늘로 찌르고 싶은 매끄러움은 아름답다기보다는 미묘하게 늙어 보이는 팽팽함이 나이는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케 한다. 의학적 손길을 거부한 자연주의파들의 자글자글한 주름은 십 년 넘게 젊어 보이는 피부 상태를 고마워해야 할지 의문스럽게 만든다. 마음고생에 비해 젊어 보이는 것은 결코 젊어지기 어렵다는 것을 수긍했기 때문이지만, 노화는 피할 수 없기에 이런 평화스러운 마음도 언제까지 갈지 모르겠다.


정신과 육체는 같은 시간에 머물러 있지 않기에 외부와 내부의 파동은 같은 시간을 타지 않는다. 모국어를 마스터한다고 해도 익숙함이란 선택된 자에게 만족감을 주지 않는다. 물고기가 자유롭게 호흡하기를 두려워할 때는 물을 떠나 있을 때이다.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의 소중함은 상실이 눈에 보일 때 더 크게 느껴진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피부가 처지고 관절이 붓고 주름이 가득해진다는 외관적인 변화만이 아니라, 소유한 것이 힘없음으로 대체되는 상실감과 중첩된다.


바르바라 블라이슈가 말하길 중년의 세 가지 자산은 경험과 인식과 거리두기라고 한다. 인생 경험과 결정 지능(crystallized intelligence)은 사실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조합해 문제를 해결하고 복잡한 관계를 해석하는 능력이다. 경험에 대한 인상은 책임감 있는 사람에겐 성숙한 인식을 제공할 것이며, 모든 것에는 응분의 결과와 끝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최근에 들은 경험과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유럽의 저명한 학자가 교수직을 그만두고 불자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15년간 절에 들어가 수련한 뒤 돌연 환속하여 원래 교수직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현명해졌는지 궁금하여 물었다.

"이토록 오래 수련한 뒤에 무엇을 깨달았나요?"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깨달음의 끝은 세상이 다양하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세상의 진리는 수많은 길이 있으며 하나의 길만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 자신의 의견이 틀릴 수도 있음을 깨닫는데 15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니, 지금이라도 당장 깨닫는다면 시간낭비를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고난을 겪어보지 않고선 인생의 무상함과 시간의 유용함을 알지 못한다. 설사 고통을 겪는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를 해석하지 못하는 게 대다수이다.


죽음을 인지할 때 인간은 두 번째 삶을 살게 된다. 죽음을 알지 못할 때는 유한한 삶이며, 죽음을 알 때는 무한한 삶인 것이다. 찰나의 시간은 떠나버린 마음과 같다. 이미 지나버린 사랑을 무엇으로 잡을 것이며 죽음과 손잡은 사람을 어떻게 회생시킬 것인가.



처음과 끝, 삶의 한가운데


우린 처음을 경배한다. 첫 시작, 첫 사랑, 첫 키스, 첫 경험, 첫 독립, 첫 월급, 첫 작품, 첫 여자, 첫 남자, 첫 결혼, 첫 아기. 그런데 처음을 경험하면 또 다른 배신의 처음이 등장한다. 첫 실패, 첫 이별, 첫 이혼, 첫 제사, 첫 장례. 처음은 다가오기 전엔 뜨거운 호기심에서 견딜 수 없는 설렘이었다가 피해야 할 금기이고 그럼에도 피할 수 없는 과정이 된다. 처음의 특징은 긴장감이 있다. 알 수 없는 것은 신경을 자극하고 집중을 요구한다. 아드레날린이 분출하는 시선은 무료해질 여유를 주지 않는다. 직장에서 사회에서 공동체에서 만나는 새로운 사람은 현재의 익숙한 사람이 지겹고 의미 없다고 속삭인다. 타인의 손길을 그리워하고 새로움이 의미를 줄 거라고 여기지만 곧 이전의 익숙함을 얻는데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된다.


인간은 길을 잃고 다시 길을 찾는다. 길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생의 길을 찾을 수 없다. 타인의 길은 나의 길이 아니다. 가끔 인생이 무료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삶을 다 살아보고 다 느껴보았는지 물어보고 싶다. 모든 것을 다 이루어서 이제는 정상에 올라 내려갈 것이 두렵다고 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회고가 어디 있겠는가.


고통과 권태 사이의 시계추는 정면으로 직시하지 않는 회피 속에서 움직인다. 끝은 있지만 끝을 보는 순간 우리는 세상에 없다. 죽음의 자각 속에서 종말로 걸어 들어가는 발걸음은 무겁지 않다. 처음이 있다면 끝이 있다. 끝이 있기에 시작도 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시작되어 끝으로 가고 있다. 그리고 이 유한의 여정에서 지금 '삶의 한가운데' 잠시 서 있다.


FISH WAVE: 인생의 중턱에서, 삶의 한가운데, 처음과 끝 사이, 나이 듦과 살아 있음에 대하여

DOCUMENT PHILOSOPHY | Written by CH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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