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RD SOCIETY

《불안사회》를 향한 서사적이고 기호적인 미래 희망

by CHRIS
[Her Self-Portrait, 2025. 11. 13. Drawing by CHRIS]


시간을 적는 행위는 하나의 생명을 가진 주체자가 존재하는 공간에서 그 순간에만 할 수 있는 일이다. 활자가 개발된 후 인물과 사건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지식을 넓히기 위한 방편이었다. 글쓰기는 사실을 적어 현장에 없는 사람들에게 시간과 공간에서 벌어진 일들을 설명하고 인간이 주체가 되어 몸에 한정시킨 시공간의 제약을 확장시켰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달을 통해 눈을 대체하는 카메라와 귀와 입을 함축한 녹음기가 발명되었고, 점차 문자를 통한 기록은 실제를 확인하는 증명보단 상상과 창작의 범위에서 제한적으로 변모하였다.


사람들의 상상은 상형화된 기호(記號)와 음의를 담은 문자를 통해 기억을 가진 인간을 대체하는 존재를 만들었다. ‘발 없는 말 천리를 가다!’ 가히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깐부치킨의 치킨게임을 코스피 사천 시대의 삼부자 회동의 대출 부적처럼 회상하며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일상에 습관을 말총머리로 길들인 채 AI시대에서 얼마나 기계가 인간과 같은 지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인간같이 자연스럽게 걷는지 확인하기 위해 로봇의 다리를 잘라 보여주겠다고? 원… 참! 미친 거지. 과학자와 마케팅의 결합이 보여주는 기발한 상상은 다 어디로 간 거야? 완전 호러물 아니야!'


영화에서 보았던 인간의 잔인성은 무감하게 화면을 뚫고 그 위용을 자랑한다. 테슬라의 사이버 트럭에 인조인간이 치이면 누가 더 강한지 보여주는 화면을 반복적으로 바라보며 이상한 세상은 틀림없다고 중얼거린다. 죽지 않는다는 것은 역시 무서운 일이다. 죽음이 존재하지 않고 오직 무용함과 유용함이 들끓는다니, AI의 개발 뒤에는 생명에 대한 에로스와 미래에 대한 열정은 확실히 없다.


꼴뚜기나 멸치의 육젓을 보며 유교의 예를 설법한 공자가 즐겨 먹었다던 범죄적 인간을 잘게 회친 젓갈을 상상한다. 기이한 기억을 가진 활자중독자는 선비가 되기엔 유약한 자존심을 내면에 깔고 증거를 통해 공정한 판단을 요구하는 각종 사건 앞에서 같잖치 않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은 것이다. 꿀 먹은 벙어리가 얼마나 답답하였으면 바다로 뛰어들었을까? 그러나 허공에, 바다에, 혹은 사람들에게 속시원히 말해도 삶은 어찌 되었든 머릿속의 상상만큼 황홀하지 않고 마음속의 기대만큼 넓지 않다. 생명으로 던져진 존재의 의무는 그저 살아가는 것이니까.


살다 보면 기호(嗜好)가 몰릴 때가 있다. 속 이야기를 쓰고 싶거나 남의 속을 들여다보고 싶을 때가 균등하게 배열되지 않는다. 계속 쓰고 만드는데 몰리거나, 계속 보고 읽는데 집중한다. 파란만장의 청년기에 허우적거린 암흑의 한 때를 상기하게 만들던 지난 5개월은 문제를 발견하고 사건을 정렬하는 순서 맞추기의 시간이었다. 이렇게 형식적인 법적 세계에서 기분을 토해내는 작업은 별로 하고 싶지 않다.


시간에서 멀어지는 방법은 시간을 뛰어넘는 이야기를 읽는 것이다. 머리가 어지러우니 잡다한 소설에 끌렸다. 나이에서, 사건에서, 시간에서 멀어진 이야기는 불안할 여지가 없다. 현재의 상황은 일이 잘못될 지의 불안보다는 침해당한 자의 급격한 피로와 분노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억울하다고 뾰로통해진 목소리를 듣다 보면 완전한 분노적인 토함은 아니다. 다만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은 멀리서 스스로를 관찰해도 과격해 보인다. 아직 풀리지 않은 사건에 불만인가? 아니, 보이지 않는 미래에 불안한 것인가? 그러나 나는 불안에 굴복할 수 없다. 하여, 항상 호기롭게 말한다.


"이 사건은 정말 오래갈 겁니다. 언제 끝이 날지 몰라요. 조급해하지 마세요."

"알고 있습니다. 계속할 것인지 끊임없이 묻는 것은 기억하기 위한 습관이에요. 전 끝까지 갈 거예요. 지친 사람이 떨어져 나가겠죠."

"불안이 지배하는 곳에 자유란 없다. 불안과 자유는 상호 배타적이다. 불안은 사회 전체를 감옥, 수용소로 만들어버린다. 불안은 이정표는 세우지 않으면서, 오로지 경고 표지판만을 세운다. 그러나 희망은 이정표를 세우고, 경로를 표시해 준다. 희망 안에서만 길을 걸어 나갈 수 있다. 희망은 의미와 방향을 찾게 해 준다. 그러나 불안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한다."

《불안사회, 한병철 Der Geist der Hoffnung: Wider die Gesellschaft der Angst, Byung-Chul Han》


《불안사회》는 얇게 후들거렸다. 은은하게 피어오른 불안과 자유는 양립할 수 없다는 한병철의 이야기를 첫 장에서 듣자마자 《불안사회》로 함축한 제목과는 달리 기나긴 원제에서 이미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희망의 정신: 불안사회에 맞서는 철학적 대항 입장 (현대의 위기 모드에 대한 철학적 반대 입장) Der Geist der Hoffnung: Wider die Gesellschaft der Angst, Eine philosophische Gegenposition zum derzeitigen Krisenmodus"이 《불안사회》의 원제이다. 희망과 불안이 반대어라고 주장하는 저자의 시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절망과 희망, 불안과 평안의 언어적 대치가 부상하였다. 곧이어 절망과 평안이 유유하게 호환되었다. 좌불안석과 평안부적이 함께 부각되는 시선적 상상은 밤의 여신 닉스가 잠들면 희망의 정령 엘피스가 어머니의 새로운 시간을 대체하는 신화를 떠올리게 했다. 철학은 혀만이 아니라 신경이 막대하게 꼬인 자들의 말장난일지도 모른다. 불안하고 가늘며 새된 목소리를 들으니 지적인 후광효과가 절반으로 반감된다.


“얼굴은 편안해 보이는데요? 세상에 대해 비관적은 아닌가 봐요?"

"마음을 조급하게 태운다고 별다를 게 있나요? 살다 보면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건데요. 사라지면 모든 것은 의미가 없어요."


미래에는 의지가 있다. 예측하거나 계획은 불가능하지만, 새로운 것의 도래를 예고하는 내일(Avenir)은 철저히 새로운 것의 초기화 작업에 두려움을 제거한다. 바람이 불어 꺾인 나뭇가지 아래는 새로운 탄생을 머금은 뿌리가 여전히 받치고 있다.


"오늘 살아있음에 감사합니다."


살아감에 그다지 감사하지 못한 자로서 사 년간 꼬박 써 내려간 삶의 다짐을 다시 불러본다. 새로운 시작에 대한 희망은 꿈 없는 현재나 미래 없는 열정과 확실히 대치된다. 진리를 독송하고 말씀을 기록으로 남긴다고 해서 찬란한 깨달음은 펼쳐지지 않는다. 열심히 사는 것에서 벗어나 시나브로의 나를 찾는데 기대감을 내려놓았던 2025년, 이른 11월에 아직 다 채워지지 않은 한 해의 일정을 점검하면서 내일 새롭게 무엇이든 시작해도 두렵지 않을 수 있는 자신감이 올라왔다. 서사적 미래를 그려낼 수 있는 희망적 상상과 능동적인 약속 앞에서 미간에 악몽으로 남은 주름을 매만지며 어깨에서 힘을 뺐다.


"과거는 용서를 통해서, 미래는 약속을 통해서 다룰 수 있다."


용서라는 감정도 내려놓고 약속은 가만히 가슴에 품은 채 깜깜한 하늘을 본다. 블로흐와 아렌트와 카뮈와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파울 첼란, 베르디의 희망은 공동의 인식을 가지는 자기 현존재의 발견이다. 죽음과 연결되는 자기 탄생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연결고리는 결국 에로스를 가진 너와 나인 우리에게 있을까? 이죽거리는 불안을 다독이며 연대하고 공감하는 내일의 창을 연다. 익히 알고 있는 희망은 아직 판도라의 상자에서 여명을 기다리며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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