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WOMEN

<두 여인 DO ZAN> 시간 속에서 변하는 우리, 그리고 나

by CHRIS
[DO ZAN, TAHMINEH MILANI, 1999]


이십여 년 전, 지금은 쉽게 작동되지 않는 인터넷 익스플로러에서만 열어볼 수 있는 저장된 시간은 미숙한 얼굴을 드러낸다. 그 시절에도 나는 소가 여물을 씹듯 당장의 감상보다는 더 먼 과거를 되새기며 몸서리치곤 했다. 며칠 전 페이스북에서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마흔 살 영화감독의 부고를 보았다. 연고 없는 알고리즘이 가져온 타인의 마지막 소식 앞에서, 나는 멀리 떨어져 있는 ‘앎’이라는 것의 성질을 잠시 바라보았다.


"거 참... 이룬 것도 없이 마감이라."


나이가 들수록 아름다움은 쇠퇴하고 잘 나가던 명성도 한낱 종잇장에 지나지 않는다. 유명해지고 부유해지는 것은 결코 인생의 종착역은 아니다.


일생에 목표로 삼았던 거창한 표상은 희미해졌어도 스스로 선택한 삶에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삶이 갈린 두 여인의 선택, 같은 나였으되 시간을 달리 한 나는 지금의 나와 같은 내가 아니다. 2025년 겨울의 초입, 2004년 11월 3일에 적어두었던 영화 <두 여인>을 펼쳐본다.



<두 여인> 남녀평등이 무너진 가식적인 오픈 마켓


타흐미네 밀라니(Tahmineh milani). 우연히 채널에서 그녀에 대한 소식을 접했다. 잡지의 스틸 사진보다 TV 화면으로 잡힌 모습은 생생하게 에너지를 발산한다. 자기만의 의지가 넘치는 마흔 중반이 넘은 모습에선 지친 혈기도 무색하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나 자파르 파나히 같은 이란의 남성감독 영화는 사실과 허구가 혼동되는 자연주의 접근과 더불어 쉽게 접해 보았지만 정작 여성의 시각으로 그려낸 이슬람 사회의 모습은 볼 기회가 없었다. 이국의 여인과 잠시 영화 통신을 해본다.

영화 <두 여인 DO ZAN>은 두 인물을 둘러싼 액자식 구조로 과거와 현재를 대비하며 사념을 몰고 온다. 개인의 능력과 의지에 상관없이 권력 지향적이고 물권적인 사회에서 시들어가는 여성의 모습을 대학 동창인 두 여인의 삶을 통해 대조적으로 보여주던 영화를 보고 기분이 침울했다. 똑똑하고 아름다웠으나 가난한 한 여자, 평범하고 별다른 재능이 없지만 부유한 다른 한 여자, 그들이 편하게 서로를 보던 시점이 갈리는 계기는 결혼이다.


극빈한 생활과 찌든 현실에 의해 남성의 호주머니 속 동전 한 닢으로 전락하여 초라하게 좌절되어 가는 한 여자의 슬픔을 사회에서 요구하는 부부 생활과 개인의 심적 갈등을 통해 보여주는 <두 여인>은 일상의 개념과 인간 본질에 대한 의식이 무의식적으로 끈질기게 달라붙으나 쉽게 처벌되지 않는 스토킹처럼 얼마나 잔혹하고 무서운 장애인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부유한 집안 배경 덕에 건설현장 감독으로 성공한 뒤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한 여자의 이야기처럼 당연한 흑백 드라마 공식은 가슴을 착잡하게 만들었다.

우리 집은 부유하지 않다. 그래선가 잘 살게 된 여자의 이야기는 별로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이 영화에서도 부잣집 그녀는 오프닝의 주인공처럼 등장했다가 과거의 스크랩이 되어 버리는 한 여자의 삶 속에 곧 묻혀버린다. 번드르르한 얼굴의 그녀는 숨겨진 아픔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표면적인 여자일 뿐이다. 대조적으로 집이란 작은 공간에 갇혀버린 초라한 여인의 슬픔은 마음을 끌어당겼다.

히잡의 얇은 가리개는 외부의 끈질긴 비웃음에 소용없이 무너진다. 스토킹에 의해 상처 입은 여인이 선택해야 할 것은 돈을 따르는 결혼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하늘로 돌아가지 못하게 두 아이를 만들어 놓고 씨족만을 돌보라고 재촉하는 이기적인 나무꾼 남편. 외부와 단절된 채 오직 아이와 가사만 돌보기가 지루하여 읽은 책은 열등감의 소산인 무지와 시기심 앞에서 불태워지고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버리는 절망.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물리적인 가해가 없으면 증거주의를 외치는 법정에서 이혼도 외면당하는 모순. 자신을 옥죄는 집을 탈출해도 비정상적으로 굳어져버린 스토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의식적 압박. 쇠사슬이 되었던 남편도 정신이 돌아버린 무형의 칼에 찔려 생을 마감하는 비극까지 자유를 바라던 한 여자에게 급박히 다가온 해방은 삶을 바로 보라고 자극하는 최선의 시점이었다.

다른 환경에 놓여있던 여성의 삶이 결혼 후 어떻게 변하는지 보여주던 <두 여인>은 단순히 결혼제도에 대한 비판이나 남성의 이기심을 지적하는 영화는 아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삶의 자유와 자아 찾기는 사회의 공동 노력과 의식을 깨우는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고선 뿌리 깊이 박힌 인식의 늪과 엇나간 현실을 떨쳐낼 수 없음을 절감하게 했다. 잘못된 문법을 따라가는 가족이건, 사회건, 국가건, 개개인의 단위 구성원이건 학습으로 형성된 고정된 사상이 가리키는 방향을 만족한다면 스스로를 가려버린 억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삶의 모순을 알면서도 불평등을 따라가는 맹목적인 추종은 멈춰야 될 것이다. 부와 권력, 제도와 현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잔인한 역사의 현장에서 무엇이 옳다고 볼 수 있을까.

타흐미네 밀라니가 찍고 있는 불륜에 대한 영화는 기대가 된다. 남녀평등을 걷고 있다고 자부하는 오픈 마켓의 가식적인 상황을 종교 규범과 국가 권력이 결합된 공식·비공식적 억압 제도 아래에서 더 극명하게 나타낼 수 있으리라 본다. 남자와 여자 똑같이 불륜을 저질렀지만 결국 살해당하는 사람은 여성이 되고 마는 현실은 역사적으로 욕망의 무게를 사회적 지위에 대입하여 진실을 희석시킨 전통적인 인습이다.

무슬림 평민들의 평이하고 관조적인 삶의 시선은 신선했다. 과격한 이슬람 원리주의자가 내세우는 사상과 체제의 정통으로의 복귀는 무력을 바탕으로 한 해결점만을 제시한다면 납득하기 힘든 난제이다. 히잡이나 니깝, 차도르, 부르카가 이란 및 주변 이슬람 여성들의 얼굴과 몸을 다양한 길이와 형태로 가려왔지만 베일 밖으로 불거지는 뜨거운 마음까지 가리진 못한다.


이미 주어진 생의 조건 앞에서 정당한 선택권이 보장된 사회는 미래에도 힘든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다. 페르시아의 거대한 심장부인 이란은 걷고 싶은 나라였다. 답답한 베일을 걷고 시원한 바람을 맞는 사람들처럼 갑갑한 작은 방에서 벗어나야 한다. 방 크기 반도 안 되는 사이즈의 관에 몸을 움츠리며 땅 속에 묻히고 싶진 않다. 페르시아 사원에서 히잡을 두르지 않고 신의 바람이 깃든 화려한 타일을 보려면 어느 쪽 시간의 저울이 빨리 돌아야 할까.



시간의 선택 후에


솔직하게 마음을 드러내도 부끄럽지 않다는 우쭐거림으로 과거를 정리해 보겠다고 옛날을 들쑤신 지도 두 해 가까이 되어간다. 그런데 글감이 있을 땐 솔직히 말하고 싶지 않고, 글감이 없을 땐 이전의 고통에 기대는 속내 역시 부끄럽기 마찬가지다. 아직은 마음이 여물지 못한 탓이다. 누구보다 잘났다고 껄떡거리면서 고상한 단어를 굴리는 이면에는 변해가는 세상을 보면서 어떻게 살까를 궁리하는 모습이 가득하니 말이다. 이렇게 써보았다가 저렇게 써보았다가 여유롭게 집중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변명을 뒤로하고 속박 없이 자유롭게 나를 향해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쉬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쉴 때가 아니긴 하다. 눈을 감으면 영원한 쉼이 있을 것이기에 그래도 살 때는 움직이는 게 낫다.


“할 일이 있고 자기 능력으로 돈을 벌 수 있다면 남들보다 혜택 받은 삶일 거야. 가만히 놀면 뭐 해? 해외에 일하러 다니고, 남들 가보지 못한 곳에 다니고, 자긴 매일이 여행이잖아.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고 생각해 봐. 매일 누워있다던지 매일 놀러 다닌다고 해도 소모적인 삶은 언젠가는 지겨워질 거야. 넌 행복하지 않니?”


‘행복한가..!‘


워커홀릭의 삶은 즐겁지 않다. 그렇다고 베짱이는 체질이 아니다. 한 철을 위해 준비하던 사업방향을 미래적으로 바꿔보겠다고 도모하다가 홀라당 개념의 씨를 털린 이후, 몇 달을 해결책에 집중하고는 또다시 탈출구를 찾고 있다.


"거절에 익숙해지고 어떤 조건에서건 살아남아야 해. 나는 사는 게 전공이니까."


학창 시절이나 청년기에 쓰던 일기를 들여다보면, 다른 생각과 다른 삶과 다른 꿈이 보인다. 진창에 빠져도 벗어날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과 고집스레 살아남겠다는 집념의 이면엔 제대로 살고 싶다는 욕망이 가득했다.


"이젠 오래 살아남을 실력을 발휘할 때야."


대학 시절엔 독립영화와 작가주의 영화를 즐겨보았다. 답이 보이지 않는 세계는 남들과 똑같은 얼굴로 조급증에 걸려 타인에게 기대 살지 말라고 속삭였다. 바깥일에 주력하는 남자들과 안 살림에 갇힌 여자들은 옹립할 수 없는 종족으로 보였다. 안팎이 분리된 삶이 정답처럼 보이던 공간에서 고정관념을 벗어버리는 허물도 계기가 있지 않으면 쉽게 문이 열리지 않는다. 사는 게 뜻대로 되지 않고 누구나처럼 편하게 꿈을 꾸기 어렵다 보니 사람들이 즐겨보는 성공의 이야기보단 해방의 시원함을 가진 특별한 세계에 매력을 느꼈다.


"자유로운 거지가 되는 거야. 연고지도 없는 무명자!"


말도 안 되는 상상에 집중하며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촛불에 그을려 몸이 말린 풀떼기처럼 심정이 오그라들면 오기스럽게 머리를 들고 주변을 정리를 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예술은 스스로에게 쉽게 전하지 못하는 진실을 반쯤 미친 척하면서 밖으로 꺼내어 자기를 들쑤시며 찾아가는 여정이지 않던가.


살다 보면 언젠가 만나게 될 마감의 길이 있을 것이다. 남자 역할 하기도, 여자 역할 하기도, 부모 노릇 하기도, 자식 노릇 하기도, 잘난 체하기도, 못난 체하기도 쉽지 않은 세상에서 이미 많은 것들이 변해 있다. 익숙하지 않은 세상에 적응하라는 요구는 나이를 따지지 않는다. 시간 속에서 살아남는다면 변화는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익숙한 것들과 작별하며, 다시 한번 오래 살아남을 연습을 한다. 시간이 흘러도 변화한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변화한 내가 바로 나임을 알아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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