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이고 상대적인 《타인의 고통》, 수전 손택(Susan Sontag)
피사체를 쏘는 카메라와 인간을 쏘는 총은 닮았다. 정확하게 대상을 꿰뚫는 순간 시선을 사로잡는 인간의 광기와 포악함은 최고치에 달한다. 스릴과 전율을 뒤로하고 기억을 담는 프레임 속 정지된 이미지는 매달린 시간을 끌고 온다. 수전 손택은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하다고 말한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구도를 잡는다는 것이며, 구도를 잡는다는 것은 뭔가를 배제한다는 것이다."
작가가 대상을 순간적으로 포착한다고 해도 완전한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시각을 표현한 화가와 환기 없는 현장의 기록을 담는 사진작가는 사실전달의 허용범위에서 다른 기준이 적용된다. 현장의 조작이든 사실이든 간에 시간이 지난 과거의 사실은 타자의 기억 속에서 살아남는다면 역사적인 증거로 남게 된다. 매달린 죽음 앞에 전시된 인간들은 이기적인 유전자로 살아남게 조작되었다. 잔악함을 사랑하는 살아남은 자들은 관음적인 향락에 젖어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고통은 소비되는 감정과도 같다. 시각적인 고통이 강렬할수록 감정적인 자극도 강렬해진다.
'고통은 절대적인가? 상대적인가?'
과거엔 부주의했다.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생각에 몰입하면 눈앞의 화면은 환상의 나라로 변했다. 멀쩡하게 걷다가 엎어지고 돌부리에 차이고 나뭇가지에 쓸려 생긴 생채기는 빈번하여 바짝 마른 눈 주위를 무색하게 했다.
"안 아파? 피가 이렇게 나는데?"
"이 정도 가지고. 쓰리긴 한데.. 며칠 지나면 살이 올라올 거야. 두들겨 맞는 것보다 덜 아파."
"윽. 보는 게 징그럽다."
"표피 아래 근육이 있고, 그 아래엔 뼈가 있어. 살이 차오르겠지. 아니면 계속 저렇게 파여있던지."
"지 살보고 꼭 남 이야기 하듯 한다."
뻐기듯이 피부를 엄습한 상처를 아프지 않다고 자랑하던 아이가 있었다. 육체적인 상처를 입으면 당장의 아픔에 온 신경이 집중된다. 그러나 일 년 뒤도 삼 년 뒤도 동일하게 그만큼 아플까? 육체와 정신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가지는 한계는 냉혈한 관조를 몰고 온다. 살갗에 접근금지 훈장이라도 얻은 듯 육체적인 상처만이 아니라 마음적인 고통이 있어도 아프지 않다고 말해야 강하다고 믿던 시절은 거짓임을 알게 된 것이다. 흡사 산타클로스는 인간이 만든 환상임을 어른들의 고백에서 알게 된 것처럼.
“지금은 마음이 아픈 거야. 이건 육체가 아픈 게 아니라고. 육체의 고통은 이미 지나갔어. 마음도 사실은 아프지 않아. 아프다고 말하는 것은 환상인 거야.”
시간이 지나 아물 상처라면 당장 그 고통에 무감해지고 멀어지는 것이 현명하다. 심적인 고통이 밀려오면 가까이는 일 년 뒤를 멀게는 십 년 뒤를 상상한다. 몸 안으로 밀어닥친 아픔을 멀리 보는 방법은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직시하는 것이다.
알지 못하는 현상에 대해 '공감'을 외치기보다는 '반기'를 드는 반골 특성상,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며 실제로 느껴지지 않는 고통은 바라보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도 아님을 알게 되었다. 현재는 고통의 강도가 낮은 상태를 전혀 공감하지 못한다. 살아남기 위해 애썼던 시절, 스스로의 아픔에 집중하면 타인의 아픔을 신경 쓸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상기하기는 일종의 윤리적 행위이며, 기억은 이미 죽은 사람들과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가슴 시리고도 유일한 관계이다."
죽음과 고통이 소비되는 박물관만이 아니라 소식을 담는 텔레비전과 멀어진 지도 십 년이 넘어간다. 카메라에서 손을 놓고서 핸드폰 카메라로 대체한 지도 이십 년이 되어간다. 그래도 세상을 볼 수 있고, 업무를 수행할 수 있고,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감정을 체로 거른 무공감적 태도는 경험적인 이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겪어보지 않은 일에 공감을 요구하는 행위에도 담담히 대처하게 되었다. 타인의 고통은 정면으로 바라볼 때 날카로운 자각을 선사한다. 바로 절대적이고 상대적인 고통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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