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AINST INTERPRETATION

《해석에 반대한다》, 해석되지 않고도 존재하는 삶으로

by CHRIS
[I, CHRIS, Against Interpretation], 2025. 12. IPAD Drawing by CHRIS


해석에 반대하는 예술 세계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과 세계에 대해 가하는 복수다."

《해석에 반대한다 Against Interpretation, 수전 손택 Susan Sontag》


해석은 예술과 세계의 주동자의 입장에선 바라보지 않던 이성에 감정을 싣는 수단이 될 것이고, 예술과 세계를 바라보는 지식인의 입장에선 감정을 이성적으로 실어 나르는 수단이 될 것이다. 눈앞의 세계를 자신의 언어와 감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사물의 현재를 새로운 창조로 이끈다.


“언젠가는 예술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것 자체가 혁명이었다. 또 언젠가는 예술작품을 해석한다는 것 자체가 창조적인 활동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감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똑같은 모습에서 다름을 찾아내고, 특출한 형식을 만들어 기존의 놓인 세계 이면의 또 다른 문을 여는 작업은 희열이다. 하루 종일 쓸 자유, 하루 종일 만들 자유, 하루 종일 그릴 자유처럼 원하는 것을 할 자유를 위해선 생계 걱정이 없어야 한다. 자유를 사랑하는 자로서 한없이 미뤄진 작업에 앞서 회사를 만든 이유는 시간에서 자유롭기 위해서였다. 청년기의 나는 애증과 돌봄이라는 감정의 혹을 달고 업무 사이클과 활동 반경이 제한된 불합리한 삶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이든 시작도 하기 전에 몇 달 안이나 몇 년 안에 외부의 개입에 의해 설계구조가 무너진다면 지속하고자 하는 의지는 사라지고 만다. 그 순간 생계형 일을 해야 할 것이고 쳇바퀴를 돌다 지쳐버릴 것이 분명했다.


언제 시작될지 모르지만 열망하던 작업을 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한 구조를 설계했다. 먼저 기본 사업적 토대를 만들고 관련 업체들과 은행을 방문했다. 상상하는 구조의 존속을 위해선 자금이 얼마나 필요한지, 이름이 생긴 법적 존재의 지속적인 방향과 투자조건은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적정한 사업들은 사회적 프레임 속에 다양했다. 다만 그 항목의 기준은 생각보다는 높았고, 소망과는 달리 단숨에 정상에 올라서기란 시간과 현실적 능력에서 부족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에 형성된 사회의 기준 조건이 눈앞에 있을 때 타인의 시선과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아무것도 없이 맨 몸으로 부딪히는 세상은 빈약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비춘다. 그러나 준비되지 못한 상태를 부끄러워할 것은 없다. 생명체라면 모두 그러하듯 알몸으로 태어나고 죽을 때도 알몸으로 돌아가서 형체 없이 사라지지 않는가.


타인이 평가하는 나는 스스로에게 큰 의미는 아니다. 보이는 외관은 코끼리의 다리처럼 일부일 뿐이다. 타인과 기관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 냉정한 현실을 깨닫고서 누군가의 물질적인 후원을 받거나 금전적인 투자를 받는 것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동시에 타인에게 기대는 것도 멈추었다. 나에게로의 회귀와 집중을 통해 자립 능력을 키우고 살아남는 체력을 높이자고 결심했다. 변화의 시간에 대한 개념도 길게 연장하였다. 기존에 타인을 향해 쏠려있던 해석들을 나에게로 돌린 것은 거절이 만성화된 무렵이었다. 해석을 거부하는 세계에 도전장을 내기보다 사회적인 나를 만들고, 나를 해석하고, 나를 단련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가장 미스터리 하고 독해하기를 열망하는 것은 바로 나였으므로.



예술의 성애학


"해석학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의 성애학(erotics)이다."


사물과 현실, 가치와 모방의 입장에서 예술의 목적과 태도를 살펴보면 존재는 존재 그대로인 것이지 존재가 무엇인지 증명할 필요는 없다. 사물을 해석하는 이론이 등장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의무가 생겨나면서 예술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니게 되었다. 인간의 평가는 주관적이고, 시대에 따라 대상의 가치는 변한다. 사회에 놓인 인간만이 오롯이 생명의 주체로서의 존재를 주창할 권리를 획득한다. 개별적 가치는 존재에게 이미 주어졌고 존재 스스로가 만들어야 하는 것이며 외부적 요건에게 휘둘릴 이유는 없다. 존재론적 증명으로서 해석은 예술가에게 본질을 벗어난 것이므로 의미롭긴 어렵다.

"예술이 무언가라고 할 수 있다면, 예술은 모든 것이다. 예술은 자기 완결적이며,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로브 그리예

"모든 심미적 대상은 생명력을 분출하는 자기만의 공식을 갖고 있다. 이 공식이 대상마다 고유한 특정 리듬을 통해 우리 경험에 새겨지는 것이다. 모든 예술작품에는 포착하고 전개하고 중지하는 과정에 하나의 원칙이 구현된다. 그 예술가 한 사람만이 지닌 힘이나 느슨함, 애무의 손길이나 파괴의 손길을 남기는 것이다." 레이몽 바이에(Raymond Bayer)


자필로 서명한 의지를 결정하는 원칙이 스타일이라면, 오감에 받아들이는 태도를 표현하는 작업이 바로 스타일이다. 예술작품에서 필연적인 것은 결국 스타일이고, 감각에 흔적을 남기는 방법이며, 감각에 남은 인상과 기억을 중재하는 수단이다. 일기는 '작가의 영혼을 그대로 보여주는 현장'이라는 손택의 말에 공감한다. 정제된 작품보다 더 날 것의 생의 비린내가 위장을 흔든다. 삶의 고통에 대응하기 위한 삶의 결과물들은 신비롭게 여겨진다. 껍질을 벗어버린 내부를 응시할 자는 많지 않다. 그래서 일기가 흥미롭지 않은 사람은 관심이 가지 않는다.


반자유주의적 광기, 반부르주아적 태도, 음울한 얼굴, 히스테리 환자, 불온한 의식, 고난에 대한 탐닉, 고집불통, 절실한 타락, 자아의 파괴자와 같은 작가들에 대한 사랑은 청춘기의 열병과 같다. 위대한 작가들에게 남편이나 애인에게 느끼는 사랑의 감정이나 열정이 생기던 시기도 지나갔다. 비극의 죽음, 차가움의 미학, 이야기의 경험이 남긴 흔적은 소설, 연극, 시, 회화, 음악, 춤, 사진, 영화를 막론하고 수백 수천 작가들의 내면을 훑어내린다.

"내가 말하는 언어란 아무리 추상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어떤 예술가가 자신의 생각을 담아내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해 낼 수 있는 형식, 수필이나 소설로 그렇게 하듯이 자기의 강박관념을 옮겨낼 수 있는 형식이다. 영화는 시각, 이미지 자체를 위한 이미지,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일화라는 폭정에서 해방되어, 점차로 종이 위에 쓰인 말처럼 유연하고도 미묘한 글쓰기 수단이 될 것이다." 《카메라-만년필》, 알렉상드르 아스트뤽

수전 손택이 해석하는 익히 알고 있는 작가들과 작품들의 이름을 읽으면서 지나간 과거와 묻어둔 사상의 시간이 중첩되었다. 자유와 책임은 언제나 함께 한다.

"사람은 스스로 예술작품이 되든지, 예술작품의 성격을 띠어야 한다"

"인생은 진지하게 논하기에 너무 중요한 것이다."

"삶에서 비정상적인 것이 예술에서는 정상적인 것이 된다. 삶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예술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일뿐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반짝이는 캠프적인 격언은 열다섯의 폭풍을 지나 세상을 뒤로한 손택을 거쳐 현재에 살아있는 나에게까지 아직 유효하다. 다원적 감수성은 복합적이라 이해불가능의 선에 놓여있지만, 이 또한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해석에 반대한다》, 해석되지 않고도 존재하는 삶으로


매해 많은 일이 일어나고 한 해가 저문다. 그리고 해가 떴다가 저물듯이 생의 사건은 일어났다가 소멸된다. 사업을 시작한 이래 법적 대표로 진행한 소송은 올해로 세 번째이다. 한 번은 승소했고, 한 번은 코로나로 흐지부지됐고, 이번은 회사 내 외부에서 콰트로 앵글로 격발하여 넉 달간은 소장을 쓰고 사건을 올리느라 밤을 새웠다. 회사의 대표와 저작권자로서 사회적 개인이 아닌 법적 개인으로 전환한 상태에서 사회적 방어선을 쌓는 일은 사건에 거리감을 준다. 열아홉과 스물, 성격만이 아니라 인생을 바꾸어놓았던 가정사는 집요하게 추적하는 습관을 발동시켰다. 예술이건 뭐건 살아남기 위해 사건에 얽힌 조각 퍼즐을 시작한 시간으로 이동했다. 다변화된 업무를 수행하며 역할놀이를 즐겨하는 타입으로 전환한다.


개인적으로 자극이 생기면 나라는 인간을 분해하게 된다. 나는 자아가 큰 인간이다. 사람을 그릴 때도 먼저 눈과 코, 입을 그리고 얼굴을 완성한다. 머리만 둥둥 떠다니는 인간을 먼저 완성한 뒤 목과 몸통, 팔과 다리, 손발을 그린다. 대화하고 싶을 땐 상대의 눈을 응시한다. 관심과 열망 속에서 대상의 해석은 자동으로 작동한다. 대상이 글자이든 사물이든 사람이든 무생형이든 존재가 인식되면 눈을 감고서도 이야기가 가능하다. 나를 버려야 도처에서 나를 찾을 수 있고 내가 없음을 알 수 있기에 나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존재론적으로는 살아가는 동안에 도저히 버릴 수 없는 것이 바로 나이기도 하다. 수면 아래 잠재웠던 투지가 올라온다. 공격적인 호르몬이 분출하고 모든 에너지는 목표점을 뚫기 위해 사건 조합에 몰두한다. 침묵이 길어지고 잠이 줄어든다. 스트레스가 극적으로 올라가다가 문제해결을 완수해야만 살아남는다는 현실적인 충격이 오면 그때서야 날카로운 칼을 빼들고 전면으로 나선다.


지적자산이 침탈당한 뒤 디지털 작업으로 가속 선회했다. 한 해를 정리하면서 돌이켜 보니, 이번의 사건은 내가 나를 방어하는 방식을 바꾼 계기가 되었다. 모든 의지를 점검하고 외부에 쏠리는 에너지를 거둬들였다. 스스로의 능력이나 노력이 아닌 감정에 호소하는 인간들은 부담스럽다. 감정은 신기루와 같다. 감정의 구조는 불쑥 어딘가에서 솟아오르나 쉽게 잡을 수 없고 근거가 없으며 소멸예측이 불가능하다. 사람은 가축이나 기계가 존재하기 이전엔 육체적인 힘을 쓰고 그 대가로 용역비를 지급받거나 보상을 받는 구조로 생명을 이어왔다. 우리가 가장 편하게 돈을 버는 방법은 용역이다. 시간 대비 힘을 쓰면 되니 질서 유지에 지능을 쓸 이유가 없다. 아니러니 하게도 자신을 아는 인간은 많지 않다. 헛된 꿈에 부풀어서 변화된 미래를 만들기 위해 오늘을 희생할 생각은 없고 남이 설계한 세계에서 자신을 내던지는 사람과는 담담하게 결별한 셈이다. 시간을 소비할 뿐 시간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는 것은 제작자의 입장에선 의무위반이다. 제작자라는 표식 아래 상품을 소비하지만 상품을 만들어내지 않는 것과 같은 이론이다. 현재의 자신을 바꾸고 싶다면 지금의 시간을 변화의 방향으로 쏟아부어야 한다.


모호하게 말하는 방식은 독백하는 자에게 자신감을 준다. 나는 처음 말을 배울 때부터 미스터리 한 화자가 되고 싶었다. 대상을 쉽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은 탐구심을 빼앗는다. 미지의 대상을 접촉하면 뜨거운 아드레날린이 솟아오른다. 누군가가 나를 안다고 하면 신기하다.


'내가 나를 알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당신은 나를 어떻게 알지? 이런 사람이라고 정의를 내린 것은 바로 나인가?'


관철하는 주장은 강해도 스스로의 능력 안에서 사건을 소화하고 살아가면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인생 철칙을 바탕으로 살아왔다. 내 안으로 시선을 거둬들이면서 시간의 변화를 가까이 느끼고 있다. 육체적인 시간은 한계가 있다. 꿈같던 예술로 삶의 변화를 주기 전에 경제적으로 자유로워지려고 한다. 이런 방향 전환은 인식의 확장으로 해석하고 싶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다수의 문제는 돈에서 시작된다. 빨리 돈을 벌고 싶고 부자가 되길 원한다. 그리하여 평범하고 탐욕스러운 인간들은 타자의 경계를 침범하고 무리하게 책임질 수 없는 범위로 욕심을 확장한다. 자본의 힘은 일정 부분 쌓이면 새로운 형태를 만들 수 있다. 급격하게 움직이기보단,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고 작업을 할 수 있는 힘을 갖추는 게 우선이다.


타인과 맞닿은 접점을 유지하기 위해 젊음을 바치지만 온전히 스스로와 타인을 지탱하는 힘을 길러 다시 나의 길로 돌아왔을 땐 좋아하는 작업을 하며 평생 살아가겠다고 다짐한 이십오 년 전, 이제 남은 것은 경험에 깃든 의미로운 실패이다. 사건을 끌고 가는 관리능력과 자본의 유동성만 확보되면 작업을 하면서 버틸 수 있다. 삶의 전환을 마치고 살아남는다면 새롭게 해석하는 나를 깨울 수 있을 것이다. 존재는 존재 그대로로 충분하다. 나는 이제, 해석되지 않고도 존재하는 삶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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