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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RST FOR STORIES

이야기에 목마른 명품사회

by CHRIS
"If a story has already been spoken, shouldn't it be drunk if it can't be contained?


하이텔, 나우누리, 유니텔, 천리안이 유행했던 90년대 당시, 파란 화면이 주는 중독성에 빠졌던 젊은이들에게 소위 '번개'라는 즉석만남이 선풍이었다. 플라스틱 네모 상자를 앞에 두고 얼굴도 볼 수 없는데 채팅으로 대화했던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해 달콤한 상상을 하는데 하루종일 시간을 허비했다. 하얀색 커서가 움직이는 순간은 그다음 말이 무엇일지 얌전한 새색시가 되어 기다리도록 목 부분과 두 손에 긴장을 가득 불어넣었다. 요즘의 카톡이나 페이스북 메신저로 진행하는 로맨스 스캠과 다른 기다림의 강도로 글자에서 상상의 엔도르핀이 나왔던 듯하다. 그나저나 영화 [접속]처럼 연애감정이 터져 나오는 괜찮은 남녀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사실은 후문으로 붙여야겠다. 2000년대로 넘어가면서 얼굴 없는 온라인 작가와 웹툰 작가, 목소리만 나오는 가수들이 신선하게 대중에게 어필됐다. 현재는 AI를 빌려서까지 무한한 공간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썼을 거라고 추측되는 이야기들은 진실이든 허구이든 보지 않는 것에 대한 기대감을 불어넣고 있다. 끊임없는 재창조를 반복하는 가상공간에 사람들을 미치게 하는 본질은 무엇일까? 우리는 필사적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으면서 왜 나 아닌 타인의 삶에 목말라하는가?


마릴린 먼로의 트렁크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잠을 뒤척이던 2013년 5월, KBS에서 본 기억을 떠올려본다. [마릴린 먼로 가방의 숨겨진 이야기(Unclaimed Baggage)]는 일본의 마술사로 일하고 있는 프린세스 덴코가 마릴린 먼로가 묵었던 호텔방에서 -꿈결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먼로가 자신의 트렁크 행방을 물어보는 이상한 경험을 하면서 시작된다. 15년 후, 덴코는 마릴린 먼로의 유품경매장에서 그녀의 트렁크를 발견하고 매니저에게 트렁크에 관해 조사를 부탁한다. 이 과정에서 트렁크 속에 담긴 먼로의 어린 시절, 삶, 여행, 커리어, 사랑 등의 이야기가 시간을 거슬러 밀려 나온다. 다큐멘터리 속 루이비통의 오래된 먼로의 트렁크는 먼로보다 더 비밀스러운 기억을 끌어안으며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루이비통을 사랑하는 일본인들을 위해 LVMH(Moët Hennessy·Louis Vuitton S.A.)이 일본인 마술사 '덴코'라는 마술적인 매개체를 통해 자신의 브랜드 역사가 마릴린 먼로라는 대스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보여준 작품이 아닌가 한다.


루이비통이 진행하고 있는 아날로그적인 홍보방식은 이미 10년 전부터 '이야기'를 파는 명품브랜드로 변화를 시도한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루이비통의 3대 계승자였던 가스통 루이비통은 '트렁크'라는 단어가 들어간 신문기사를 스크랩해서 남겨두었다. 그리고 '잃어버린 트렁크', '핏자국이 묻은 트렁크', '스파이', '추문', '공주' 등 트렁크와 관련된 수많은 스크랩들을 프랑스 소설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단초로 제공하고 작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갈리마르 출판사와 함께 《The Trunk》라는 단편소설집을 발간했다. 2017년 한국에서 열렸던 루이비통의 [비행하라 항해하라 여행하라(Volez Voguez Voyagez)] 전시에서 보듯이 브랜드의 역사를 보여주는 방식은 백화점 진열장처럼 단순히 가방을 늘어놓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루이비통을 상징하는 여행용 가방들을 사막이나 바다에서 저 먼 창공까지 자동차와 기차, 배와 비행기 등 다양한 운송수단을 통해 운동감 있게 배치함으로써 루이비통과 함께 한 그 누군가의 여행추억을 담아내는 동시에 가방의 제작자들을 연대기적으로 기록하여 오랜 시대감을 지닌 브랜드를 구현하였다. 최근에는 루이비통이 고급 레스토랑도 열고, 경력단절된 여성들에게 희망찬 메시지를 전달하는 등 멀티서비스로 전환하던데, 이 방식은 가히 '프라닭'을 뒤집어놓은 문어발확장이라 스토리 전개 이외의 얼마나 친절한지를 부연하는 참조 혹은 부록 정도로 봐야 할 듯하다.


또 다른 브랜드 스토리 구성의 일례로 2013년 진행했던 에르메스 신발의 상상컬랙션도 빼놓을 수 없다. 에르메스(Hermes)의 구두컬랙션 발표회에서 피에르 아르디(Pierre Hardy)의 여름 라인은 'Walk and Talk'라는 주제를 선보였다. 발과 입은 신체적으로 먼 거리이다. 그는 신발마다 각각의 사연을 집어넣고 신발들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여성용 여름샌들을 여성승객으로, 남성용 보트슈즈는 선장으로 만들어 이들의 야릇한 선상의 밀담에서부터 남성용 운동화의 매너리즘에 빠진 나른한 독백, 조엘 부비에가 연출한 신발들의 역동적이고 우아한 무언극까지 한데 묶어놓았다. 이렇게 이야기와 퍼포먼스를 집어넣은 에르메스는 이종 예술과 컬래버레이션을 계속적으로 시도하여 요즘은 인스타그램에서 세계의 아티스트들의 전시장을 구축하고 있다. 시, 춤, 음악, 그림, 사진 등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진 개성적인 예술가들과의 협업으로 시각적인 단편물을 만들어 '에르메스=아트'를 구현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삶을 투영한 예술은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고, 값어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지니 말이다.


브랜드에게 '스토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프라다나 까르티에는 한 편의 영화로, 에르메스는 간편한 여행 책자로, 루이비통은 역사와 희소성을 보여주는 소설과 전시로 마케팅 방식을 다원화하고 있다. 브랜드가 만드는 상품의 값어치는 껍질 속의 알맹이에서 나온다. 데미안》에서 언급했던 새의 본질처럼 브랜드에게 자아가 있다면 패키지 디자인이나 외관도 당연히 중요하겠지만 그 안의 알맹이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게 필요하다. CAZA는 태어난 지 긴 세월을 겪지 않았으므로 어제의 탄생 설화와 내일의 항해에서 그 기초를 살펴야겠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먼저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헤르만 헤세, 데미안》


“The bird fights its way out of the egg. The egg is the world. Who would be born must first destroy a world. The bird flies to God. That God's name is Abraxas.” 《Hermann Hesse, Demian - Die Geschichte von Emil Sinclairs Jugend》


새의 탄생, 비상과 유영, 그리고 죽음과 회귀는 모든 생명체의 순환과 같은 모습이다. '새'를 브랜드라고 본다면 이름을 얻은 아기새에게 어떤 성장기를 선사해야 할지 생명을 준 디자이너는 고민해야 한다. 풍부한 기술과 번쩍이는 자본에 현란해진 사회에서 다양한 소리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변사나 되어볼까. 할아버지 할머니 곰방대에서 무럭무럭 피어나는 연기처럼 뭉글뭉글 터져 나오는 이야기에 늘어지는 편안함과 인간적인 향수를 느끼다 보면 나의 아기새도 외롭지 않을 테니까.


[A STORY ABOUT A STORY], SELF PORTRAIT, 2006. PHOTO by CH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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