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이 불어 풍차를 돌린다. 그러나 사실은 밝히고자 한다.
바람이 불면 누군가는 몸을 낮추고,
누군가는 등을 돌린다.
그리고 누군가는 풍차를 세운다.
같은 바람인데도 선택은 다르다.
나는 그 바람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밀려난 자리에서, 이 바람을 원망할지
아니면 다른 방향으로 돌려볼지 생각해야 했다.
나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보고서를 쓰는 사람이다.
수치와 사례를 모으고, 서로 다른 이해가 충돌하는 지점을 정리해
하나의 문서로 완성하는 일.
그래서인지 설명보다 결론이 먼저 도착하는 상황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박동훈은
회사 내부 감사에 휘말린다.
그는 부당한 오해를 받지만
감정적으로 폭발하지 않는다.
술에 취해도 부하 직원 앞에서는 선을 넘지 않고,
자신을 도청한 사실을 알게 된 뒤에도
상대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그는 묵묵히 일하고,
사람을 함부로 잃지 않는다.
결국 그는 임원이 되지만,
시청자가 기억하는 것은 승진이 아니라
그가 끝까지 지켰던 태도다.
나는 그 장면들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상황이 억울하다고 느껴질 때,
사람은 쉽게 날카로워진다.
그러나 날카로움은
상대를 베기 전에
먼저 나를 상하게 한다.
나는 연구자로 돌아갔다.
데이터를 다시 보고,
현장에 더 가까이 앉았다.
결재선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보고서 한 줄을 쓰기 위해 감당해야 했던 부담,
침묵이 습관이 되어버린 이유들.
일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연구는 더 또렷해졌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남았다.
처음의 말과
나중의 결과 사이에 생긴 간격.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가장 긴장감이 높은 장면은 파리 패션위크 직전이다.
편집장 미란다 프리슬리(Miranda Priestly)는
자신이 교체될 수 있다는 소문을 듣는다.
후임으로는 재클린 폴게티(Jacqueline Follet)가 거론된다.
겉으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쇼를 준비하지만,
물밑에서는 조용히 움직인다.
오랜 시간 곁에서 일해온 나이젤(Nigel)은
재클린의 회사로 옮겨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될 예정이었다.
그는 그 기회를 위해 오랫동안 헌신해 왔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미란다는 재클린이 아닌 자신이 남는 선택을 만든다.
재클린이 밀려나고,
그 여파로 나이젤의 승진은 사라진다.
미란다는 말한다.
“그건 비즈니스야.”
누군가는 자리를 지켰고,
누군가는 기회를 잃었다.
그 장면은 단순한 승진의 문제가 아니었다.
조직에서 어떤 결정은
표면의 설명과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
그리고 그 파장은 예상보다 넓게 번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 역시 설명할 시간을 충분히 갖기 전에
판단이 먼저 자리를 잡는 경험을 했다.
확인되지 않은 말이 돌았고,
그 말은 생각보다 빠르게 굳어졌다.
시간이 지나 공식적인 절차가 진행되었고,
경영진의 괴롭힘과 명예훼손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처음의 말만큼
그 결과가 또렷하게 공유되지는 않았다.
나는 지금,
그 간격을 그대로 두지 않으려 한다.
삼국지를 보면
제갈량(諸葛亮)은 오장원에서 병이 깊어지면서도
군량과 병력 상황을 직접 점검한다.
북벌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책임을 놓지 않는다.
그의 전략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후대는 그를 ‘충(忠)’과 ‘성(誠)’의 인물로 기억한다.
유비(劉備)는 패전 중 장판교를 건너며
백성을 버리지 않으려 한다.
속도는 늦어지지만,
그 선택은 사람을 남긴다.
조조(曹操)는 결단이 빠르고 냉정했다.
능력 있는 자를 기용하고,
필요하다면 과감히 베어냈다.
그의 세력은 강했지만
늘 긴장 위에 서 있었다.
세 인물을 읽으며
나는 승패보다
‘어떤 기준이 남았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조직은 성과로 움직이지만,
신뢰는 기준 위에 쌓인다.
기준이 흐려질 때
그 조직은 겉으로는 조용해도
안쪽에서 균열이 시작된다.
나는 현재 조직에서 연구보고서를 쓴다.
데이터를 분석하고, 결과를 설명하고,
해석의 한계를 함께 적는다.
그리고 회사에는
경영진의 부당행위를 인정한 조사 결과가 존재한다.
절차를 거쳐 확인된 사실이 담겨 있다.
그럼에도 그 내용은
처음의 말만큼 또렷하게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나는 말하고 있다.
이미 확인된 사실을
그 자리에 두자고.
이것은 복수를 위한 다툼이 아니다.
자리를 되찾기 위한 싸움도 아니다.
처음의 말이 기록처럼 굳어지는 것을
그대로 두지 않기 위함이다.
연구에서 그렇듯,
결과가 나오면
가설은 수정되어야 한다.
조직도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바람은 분명히 불었다.
나는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지금 나는
여전히 보고서를 쓰고,
동료들과 나란히 일한다.
그리고 조용히,
이미 확인된 사실이
사실로 남도록 말하고 있다.
영화 속 미란다는
“그건 비즈니스야”라고 말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건 비즈니스가 아니라
기준의 문제라고.
그리고 기준은,
누군가는 지켜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