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원의 습관, 23년의 철학

by 오피스 사가Saga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


나는 지금 데이터 분석을 기반으로 기획보고서를 쓰고

전략을 정리한다.

환경은 바뀌었다.

도구도 달라졌다.

AI가 요약을 대신해 주는 시대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종이 노트를 들고 회의실에 들어간다.

그리고 회의 중 자료가 한 부뿐이면

그것을 상대 쪽으로 돌려놓는다.

나는 거꾸로 보더라도,

상대는 바로 볼 수 있게.

아주 작은 행동이다.

그러나 그 행동이 나를 지켜준다.

보고서는

내가 얼마나 아는지를 보여주는 문서가 아니라,

상대가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지를 정리하는 문서이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내가 아니라 고객의 것이다.


2003년 1월


2003년 1월 나는 대기업 그룹 공채 신입사원이었다.

입사 후 3개월간 그룹 차원의 합숙훈련을 받았다.

그곳에서는 조직의 언어와 보고 체계, 기본 소양을 배웠다.

그리고 그 시절, 나는 두 가지를 배웠다.

그때는 그것이 철학이 될 줄 몰랐다.

그저 ‘신입사원이니까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23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그것을 지키고 있다.

습관처럼 시작된 것이

어느새 나의 기준이 되었고,

기준은 곧 신념이 되었다.


기록은 능력이 아니라 태도였다


합숙훈련 기간 동안 우리는 항상 수첩을 들고 다녔다.

강의 내용, 지시 사항, 선배의 조언을 빠짐없이 적었다.

적지 않으면 놓친다고 배웠다.

놓치면 결국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배웠다.

그때는 몰랐다.

그것이 단순한 학습 방식이 아니라

‘일하는 태도’라는 것을.

나는 지금도 종이 노트를 쓴다.

A4 용지 150매를 열제본해 나만의 노트를 만든다.

1년에 두세 권은 채운다.

매일 아침 해야 할 일을 적고,

일정 사이에는 일부러 여백을 남긴다.

그리고 그날의 대화, 결정, 흐름을

다른 색의 펜으로 채워 넣는다.

회의는 항상 수기로 정리한다.

기록은 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기술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나는 실수할 수 있고, 잊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장그래의 기록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수천 페이지에 이르는 노트를 남겼다.

해부학 스케치, 기계 설계, 일상의 관찰까지 그는 끊임없이 기록했다.

그의 노트는 과시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보는 만큼 적고, 적는 만큼 이해한다’는 태도의 결과였다.

그 기록들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아

그의 사고 과정을 보여준다.

나는 천재도 아니고, 역사에 남을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기록 앞에서는 같은 마음을 가진다.

지나가는 생각을 붙잡아 두고,

흘러가는 결정을 남겨 두는 것.

그것이 내가 23년째 놓지 않는 습관이다.


드라마 미생 속 장그래 역시 늘 메모한다.

그는 뛰어난 배경을 가진 인물이 아니다.

대신 그는 회의에서 상대의 말을 받아 적고,

집에 돌아가 다시 정리한다.

그의 성장은 화려한 재능이 아니라,

끈질긴 기록에서 시작된다.

합숙훈련은 내게 가르쳤다.

기록은 일 잘하는 기술이 아니라

일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23년째 그 태도를 버리지 않고 있다.



고객은 추상적 단어가 아니었다


합숙훈련이 끝난 뒤, 나는 해외영업 부서에 배치되었다.

업무 이해를 위해 2주 동안 공장과 연구소에서 현장 교육을 받았다.

공장은 24시간 3교대로 돌아갔다.

우리가 만드는 것은 B2B 중간재였다.

현장 직원들이 최종 고객을 직접 만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직원이 말했다.

“내가 왜 이 야심한 밤에 눈을 부릅뜨고 있는지 알아요?

고객이 원하는 걸 만들려고 하다 보니, 늘 정신이 깨어 있어야 해요.”

그는 치열한 경쟁사와의 눈치싸움 속에서
신규 거래선을 뚫고 주문을 따내는 영업사원도,
시장을 분석하는 마케팅 담당자도 아니었다.

본사의 요청과 지시에 따라 기계를 돌리는
그저 현장의 직원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에서 나는
‘고객을 위하는 직장인의 자세’를 배웠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고객은 보고서에 쓰는 단어가 아니라,
누군가의 밤을 지탱하는 이유라는 것을.

그 2주의 교육은 짧았지만,
그의 말은 23년째 내 기준으로 남아 있다.



영화 〈인턴〉에서 본 '태도'


인턴에서 벤(로버트 드 니로 분)은 70세의 시니어 인턴으로 입사한다.

그는 자신의 경력을 앞세우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는 젊은 CEO 줄스(앤 해서웨이 분)를 돕는다.

필요할 때는 조언하고, 필요 없을 때는 물러난다.

그의 힘은 경험의 양이 아니라

태도의 방향에 있다.

자신이 중심이 아니라

상대가 중심이라는 태도.

나는 그 장면을 보며

23년 전 내가 배운 두 가지를 떠올렸다.

기록은 나를 낮추는 태도였고,

고객은 나를 벗어나게 하는 기준이었다.


오래된 습관이 나를 만든다


돌아보면,

나는 대단한 전략을 배운 것이 아니다.

그저 어린 시절,

조직의 가장 아래에서

기록하는 법을 배우고

고객을 먼저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23년이 지났다.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나는 여전히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이 보고서는

정말 나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고객을 위한 것인가.

습관은 오래되면 성격이 되고,

성격은 결국 철학이 된다.

23년 전 합숙훈련과 2주간의 현장 교육은

내게 기술이 아니라 기준을 남겼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그 기준을 지키며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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