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다시 일어서기
1. 2009년 철도노조 파업과 고난의 시작
2009년, 사측의 일방적인 단체협약 해지로 인해 철도노조는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당시 노조는 노동 3권이 보장되는 공기업임에도 직권중재 등 복잡한 절차로 인해 합법적인 파업을 진행하기 어려웠습니다. 노무현 정권 말기에 통과된 필수유지업무제도 때문에 철도는 전면 파업이 아닌, 필수 인력을 남겨둔 '필공 파업'을 시작했습니다. 파업 이틀째까지는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한 노조가 합법 파업임을 강조하며 사측을 위축시키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역 상황실에 나타나 이번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엄단하겠다고 지시하자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사측의 전방위적인 압박이 시작되었고, 결국 노조는 6일 만에 아무런 합의 없이 파업을 철회하고 복귀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 200여 명의 조합간부가 해고되고 1,000여 명이 정직 처분을 받았으며, 파업 참가자 전원이 직위 해제 및 징계에 회부되는 등 대대적인 탄압이 이어졌습니다. 필수 근무자를 남겨둔 필공 파업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가혹한 결과를 맞이할 줄은 예상치 못했습니다.
2. 해고자의 삶과 노조 재정의 위기
저 역시 200여 명의 해고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지방본부 총무국장이었던 저는 파업으로 인해 철도노조의 재정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6일간의 파업으로 조합비는 거의 소진되었고, 이미 2003년 파업으로 해고 상태이던 60여 명에 더해 200여 명의 해고자 임금을 보전하는 것은 현재의 조합비로는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복귀 후 징계로 어수선한 와중에, 2003년 파업에 대한 70억 원 규모의 손해배상금이 대법원에서 최종 판결되면서 철도노조의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본조는 지방본부 총무국장 회의를 소집했고, 저는 서울 용산 본조로 출장을 갔습니다. 본조는 매우 분주했습니다. 재정국장은 회의를 주재하며 현재 철도노조의 전 재산을 은행에 근저당 잡고 대출로 생활하고 있으며, 더 이상의 한계가 있어 200억 원 규모의 철도노조에서 발행하는 채권을 발행할 계획이라고 보고했습니다. 당시 금융 위기 여파로 은행 금리가 1% 후반이었기에 채권 금리는 3%로 책정되었습니다.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본조 재정국장의 보고를 의결하고 지도부의 승인을 받기로 했습니다. 이후 노조 앞 중국집에서 200억 원 모금 성공을 기념하며 탕수육과 고량주를 마시며 채권을 모두 판매하자고 결의를 다졌습니다.
3. 조합원의 단결과 재기의 과정
용산 총무국장 회의를 마치고 저도 지방본부장에게 보고한 후, 이 안건은 중앙위원회와 지부장 회의를 거쳐 빠르게 진행되어 채권 모집이 시작되었습니다. 만약 철도노조가 무너지면 채권은 휴지 조각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렇게 불평불만이 많던 조합원들이 하나둘씩 채권을 사들이기 시작하더니 한 달 만에 200억 원 채권이 모두 팔렸습니다. 저 역시 사측과 정부의 압박이 계속되면 노조가 무너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에 내심 놀랐습니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의외로 낙관적이었습니다. 그 어마어마한 기금으로 법원에 손해배상금을 갚고 해고자들에게 밀리지 않고 매달 급여를 지급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해고자는 지방노동위원회에서 복직 판정을 받아 현장으로 복귀했고, 저는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복직 판결을 받아 1년 6개월간의 해고 생활을 마치고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노조는 불가피하게 조합비를 인상하고 채권을 갚아나갔으며, 사측의 무리한 징계는 무마되어 50여 명의 해고자를 제외한 150여 명은 현장으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4. 해고 생활의 아픔과 동료애, 그리고 성장
1년 6개월의 해고 생활은 결코 쉽게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해고 상태였지만 총무국장으로서 조합의 업무를 위해 매일 출근해야 했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았습니다. 노사협의는 계속 진행되었고, 징계위원회에 출석할 때마다 저조차 몰랐던 징계 사유가 쏟아져 나와 마음이 복잡하고 우울했습니다. 지나고 보면 추억이 되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심적으로 매우 힘들었습니다. 지방본부 간부 7명이 모두 해고당했고, 지부 간부들은 정직, 조합원들은 감봉 처분을 받는 등 모두가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노조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안하기도 했습니다.
해고 기간 동안 지방본부 간부들뿐만 아니라 모든 조합원이 징계 소명 자료를 꼼꼼하게 처리하는 실무 작업에 매달려야 했습니다. 처음 겪는 징계에 당혹스러워하는 조합원들을 해고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다독이고 현장의 요구를 들어야 했습니다. 징계위원회에 홀로 참석할 수 없는 조합원들을 위해 간부들과 함께 대리 출석하거나 참관하여 사측의 징계 사유가 부당함을 주장하는 지루하고 힘든 과정을 반복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집회나 시위, 1인 시위도 이어졌고, 나중에는 사측의 단체협상 해지가 철도노조 파업을 유도했다는 경향신문보도로 인해 '파법 유도 사건'으로 번지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지방노동위원회에서 패소하고 중앙노동위원회에서 승소하여 복직이 확정되었을 때의 기쁨은 그간의 힘들었던 일을 한순간에 잊게 할 만큼 컸습니다. 해고 생활을 함께 겪었던 지방본부 간부들은 각자의 개성과 생활환경, 살아온 이력이 달랐지만, 어려움을 함께 헤쳐나가면서 더욱 끈끈해졌습니다. 서로 양보하고 포기하며 다름이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형태로 발전했고, 지금도 그때의 인연을 이어가며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노조 활동은 아홉 번 잘하는 것은 당연하고, 한 번만 잘못해도 비난받기 쉬운 힘든 일이지만, 낯가림이 심한 저 같은 사람에게도 함께 어려움을 겪으며 다져진 동료애는 큰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해고는 회사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징계로, 퇴직금 수령, 신분증 반납, 급여 중단 등 물질적인 어려움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외벌이였던 저는 직장보험에서
지역보험으로 전환하는 등 많은 변화를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힘든 경험들이 저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음을 깨닫습니다. 노조 간부로서 조합원들의 고충을 헤아리면서도 제 자신의 어려움도 감내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었지만, 이 모든 과정이 저를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9년 같이 해고되었던 지방본부 간부들과 2019년 라오스 여행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