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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격동의 한 해

by 자유로운영혼

1991년은 대한민국에 여러모로 격동의 한 해였습니다. 민주화를 향한 뜨거운 열망과 이에 맞서는 공권력의 충돌, 그리고 세계사적인 냉전 종식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많은 이들이 혼란과 좌절, 그리고 새로운 모색을 경험했습니다. 특히 당시 대학생들에게 1991년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1. 뜨거운 거리와 차가운 현실

1991년, 90학번으로 대학 2학년이었던 저에게 4월 26일은 충격적인 날로 기억됩니다. 명지대학교 1학년 강경대 학생이 시위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는 노태우 정부의 공안 통치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폭발시켰습니다. 5월 내내 전국적으로 격렬한 시위와 집회가 이어졌고, 저는 강의실보다는 거리와 광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최루탄과 화염병이 뒤섞인 거리에서 세상이 뒤집어지는 듯한 격변을 온몸으로 느끼던 시기였습니다.

강경대 열사 사망 이후, 노태우 정권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하며 대학생 및 시민들의 분신이 잇따르는 '분신 정국'이 펼쳐졌습니다. 전남대학교 박승희 열사는 4월 29일 추모 및 결의대회에서 구호를 외치며 분신했고, 안타깝게도 5월 19일 19세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남긴 유서에는 "내 서랍에 코스모스 씨가 있으니, 2만 학우가 잘 다니는 곳에 심어주라. 항상 함께 하고 싶다"는 글이 남아있어, 그녀가 품었던 민주화 열망과 동료들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김기설, 김영균 등 여러 젊은이들이 스스로 몸을 불사르며 당시 사회의 암울함과 민주화 열망을 극단적으로 보여주었죠. 이는 3당 합당으로 정권 교체가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던 상황에서, 87년 민주화 이후 총 조직과 역량을 동원한 저항의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러나 뜨거웠던 열기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5월 8일, 분신 사망한 김기설 씨의 유서를 강기훈 씨가 대필했다는 이른바 **'유서대필 사건'**이 터지면서 공안 당국은 이를 공안 조작의 빌미로 삼았습니다. 당시에도 논란이 많았지만, 여론은 싸늘하게 흘러갔습니다. 뒤이어 6월 3일에는 정원식 당시 국무총리가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연을 마치고 나오던 중 학생들로부터 밀가루와 달걀 세례를 받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강경대 사망과 분신 정국에 대한 학생들의 분노를 상징했지만, 동시에 대중의 싸늘함을 넘어 얼음처럼 차가운 반응을 불러왔습니다.

결정적으로 30년 만에 부활한 **지방의회 의원 선거(3월)와 광역의회 의원 선거(6월)**에서 집권당인 민주자유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뜨거웠던 민주화 열기가 실제 표심으로 이어지지 않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거리에서 느꼈던 격변과는 달리 세상은 뒤집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견고해진 듯한 허무함이 밀려왔습니다. '유서대필 사건'을 대중이 정말 믿는 것인지, 여론이 이렇게 순식간에 뒤집힐 수 있는지 의아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이처럼 1991년은 저에게 깊은 냉소와 회의감을 안겨준 한 해였습니다.

같은 해 가을, 학내에서도 격동의 시기가 찾아왔습니다. 당시 한밭대학교에서는 정부의 산업대학 방침에 대한 학내 분규가 일어났고, 총학생회가 탄핵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가 형성되었는데, 이때 비대위원장을 맡았던 김범중 선배는 90학번 동기들을 이끌며 학내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가을부터 시작된 분규는 계속되었고, 결국 11월에는 학생들이 학교 본관을 한 달가량 점거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이 과정에서 2학년이었던 저는 혼란과 고민 속에 어떻게 이 사태를 마무리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다행히 김범중 선배가 모든 책임을 지는 것으로 하여 아무도 징계를 받지 않고 무사히 상황을 넘길 수 있었습니다. 당시를 회상하면 천만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해 겨울, 총학생회 선거에서는 김창주 후보가 당선되면서 한밭대 학내에서는 처음으로 민주총학생회가 탄생하는 해가 되었습니다.

92년부터 임기를 시작하게 된 것이죠. 하지만 저는 그 시작을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92년 3월, 총학생회 출범을 보지 못하고 저는 92년 1월에 군에 입대했습니다. 김범중 선배는 91년 가을 학내분규 주동자로 한밭대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수배와 구속, 그리고 징역을 살게 되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ㆍ

지금은 서울 경동시장에서 한약 도매를 하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ㆍ요즘도 저와는 종종 연락을 하곤 합니다ㆍ

군 입대 영장을 받고 선후배, 동기들에게 말도 못 하고 조용히 사라져야 했던 91년 겨울,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가 거리마다 흘러나왔습니다. 그 노래 덕분에 '나만 쓰린 게 아닌 것 같다'는 위로를 받으며 견딜 수 있었습니다.


2. 1994년, 현실을 직시하는 새로운 고민

2년 6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1994년 4월 제대 후 7월에 학교로 복학하면서 후배들의 학습 방식에 의아함을 느꼈습니다. 한국 현대사, 철학 등을 공부하며 당시 김영삼 정부를 타도하고 혁명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접했을 때 저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학습이 끝난 후 저는 후배들에게 "김영삼 정부가 타도되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만, 그렇게 되면 토론이 안 되니, 나는 김영삼 정부가 타도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할 테니 너희는 타도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보라"라고 제안했습니다.

후배들은 김영삼 정부가 독점 자본과 기득권에 결탁되어 있고 선거로는 사회를 바꿀 수 없으므로 혁명적 방법으로 체제를 전복하고 새로운 정권을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1991년 사회주의가 무너지는 것을 보며 큰 충격을 받았고, 92년 입대 후 군대에서 여러 책을 읽고 고민한 끝에 우리 사회에서 선거 없이 정권을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특히 1991년 강경대 열사 사망 이후 많은 집회와 데모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대승을 거둔 것을 보면서, 제가 인지하는 대중과 책에서 생각하는 민중, 그리고 투표를 하는 대중 간에 큰 괴리가 있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91년 겨울 소련이 붕괴하고 동구권이 몰락하는 과정을 보면서도 많은 고민을 했었죠.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저는 우리 사회에서 사회주의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복학 후 만난 후배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는 총학생회 선거를 예로 들며 "정권을 무너뜨리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니, 차라리 올겨울 총학 선거에서 선거를 통하지 않고 총학생회를 잡아보라"라고 말했습니다. 후배들은 눈을 깜빡이며 "그건 불가능하다"라고 답했습니다. 저는 "정권도 그렇게 잡는데, 대학 내에서 총학생회를 선거 없이 잡는 것이 불가능하면 정권 잡는 것은 더 불가능하지 않느냐"라고 반문했습니다. 이 토론은 결국 후배들이 저와는 논의가 안 된다며 멈추게 되었는데, 저는 이때 후배들이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일(혁명 정부 수립)은 쉽게 생각하고,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일(총학생회 비선거 집권)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모순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3. 고민 속에서 피어난 새로운 모색: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후배들과의 치열한 토론 이후, 저는 기존의 딱딱한 토론 위주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군 복무 말년이던 94년 초, 군대에서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직접 답사를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대하기 직전인 94년 3월쯤, 휴가를 나와 학교에 잠시 들렀다가 경기도 파주의 수목원을 거쳐 강원도 끝마을이라는 폐사지를 둘러보고 낙산사로 향했죠.

어설픈 첫 답사 후, 저는 역사연구회 '참터'가 단순히 책을 읽고 비판하고 학습하며 논쟁하는 것 외에, 이런 답사를 하는 것도 의미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대 후 선배들을 찾아가 제 계획을 말하고 조언을 구했지만, 대부분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름 좋은 계획이라고 생각했으나, 실행하기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91년 강경대 학생 치사 사건 이후 이어진 분신 정국, 그리고 뒤이은 지방선거의 참패까지… 세상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절감하며 군대에 갔습니다. 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고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학생운동은 급격히 퇴조해 가는 분위기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나름대로 돌파구를 찾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1994년 가을부터 '나의 문화유산 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졸업할 때까지, 정확히는 94년부터 96년까지 이어졌던 활동으로 기억합니다. 사실 처음에는 주변의 반응이 회의적이었습니다. 선배들에게 이런 아이템이 동아리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 물어보면 대부분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실제로 시작해 보니 예상치 못한 많은 어려움에 부딪히기도 했습니다.

특히 어려웠던 점은 인원 구성의 문제였습니다. 1994년 처음 답사를 시작할 때 함께했던 후배들이 2학년이 되면서 각자의 활동(학생회 등)으로 흩어져 버렸고, 95년에는 95학번 후배들, 96년에는 96학번 후배들과 함께해야 했습니다. 결국 답사 경험이 쌓여도 중간에 노하우를 이어받을 인력이 없었기에, 제가 처음부터 기획부터 실무까지 모든 것을 책임지고 후배들을 이끌어야 했습니다. 저로서는 굉장히 힘든 시기였고, 후배들이 이 활동을 이어서 해나가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당시에는 제 나름대로 '실패한 활동'이라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졸업한 후, 후배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후배들이 대학 생활 중 '답사'했던 때가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이 스스로에게 좋게 포장되고 합리화되는 측면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제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에 고마움을 느꼈지만, 동시에 그때 그렇게 좋았다면 좀 더 힘을 보태어 함께 활동을 이어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았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비록 어려움도 많았지만 모든 것이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는 저에게 학생 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고, 후배들에게도 잊지 못할 경험을 선사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활동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94년 가을 동학을 찾아서 답사!


94년 벌교. 강진. 해남 답사


4. '좋은 게 좋은 것'인가?

1995년 겨울이나 1996년 초로 기억합니다. 학내 활동가들이 계룡산에 모여 예전처럼 학생 운동 조직을 통합적으로 다시 만들어 보자는 취지로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강령에 **'사회주의'**라는 말을 넣기로 했을 때, 저는 강력하게 반발했습니다. 선거를 통하지 않고 혁명으로 정권을 전복하는 것,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계획 경제를 주장하는 사회주의는 문제가 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토론은 두세 시간 동안 길어졌고, 후배들과 저 모두 지쳐갔습니다. 쉬는 시간이 되자, 저는 시대가 바뀌었으니 후배들이 저를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후배들은 제게 와서 "회의가 너무 지루하게 흘러간다. 사회주의를 그냥 좋은 사회, 함께 사는 대동 사회 정도로 이해하면 되는 것 아니냐"며 저를 설득하려 했습니다.

그때 저는 큰 실망감을 느꼈습니다. 학생 운동은 시시비비를 명확히 가리는 것인데, 후배들은 그것이 아니라 그저 '좋은 게 좋은 거지' 식으로 넘어가려 하는구나 싶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고 보았기에 끝까지 물고 늘어졌지만, 그때 이후 저는 일정 부분 학생 활동가 조직에서는 빠지고 답사 모임에만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면 굳이 학생 운동을 할 필요가 있을까, 의식화 교육이나 학습, 책을 읽고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후로 후배들의 활동은 깊이 있는 고민보다는 학생 운동의 흐름에 따라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각 개인이 생각하고 고민해서 흘러간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다.

95년 90학번동기 윤직이와 경주 답사


5. 목포 여행에서 다시 만난 91년의 아픔

재작년인가 목포로 여행을 갔을 때, 근대화 박물관에서 91년의 기억을 다시 마주했습니다. 목포는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이어서인지, 일제강점기 항일운동부터 최근의 민주화 운동까지를 다룬 전시가 인상 깊었습니다. 그곳에서 제 눈길을 끈 것은 바로 박승희 열사의 전시였습니다. 전남대에서 분신했던 그녀가 목포와 관련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그녀의 고향이 목포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90학번으로 저와 대학 학번이 같았던 박승희 열사. 91년 당시 20-21살의 어린 나이였던 그녀가 자신의 몸에 불을 질러가면서까지 무엇을 외치려 했을까. 지금 21살쯤 된 자식을 둔 부모의 입장에서 그녀의 사진을 다시 보니, 91년에 느꼈던 감정과는 또 다른 먹먹함이 밀려왔습니다. 만약 내 아들이나 딸이 그렇게 분신을 했다면 내가 받을 충격은 어떠할까, 박승희 열사의 부모님 마음은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무엇을 그리 많이 안다고 스무 살 남짓한 어린 나이에 자신의 몸을 불살랐을까. 지금의 제 자식들을 보면 세상에 그리 많은 생각을 않고 살아가는 듯한데, 저 역시 그때는 그랬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91년도에 저와 동갑이었던 수많은 청춘들이 그렇게 몸에 불을 지르며 무엇을 얻으려 했을까요. 지금 돌이켜보니, 제가 대학 2학년 때 느꼈던 분신 정국이 부모가 된 지금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서는 느낌이었습니다.

1991년은 저에게 냉소와 회의감을, 그리고 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학생 운동의 과정은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를 여실히 보여주며 많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시대를 관통하며 쌓인 고민과 경험들은 저의 삶과 가치관을 형성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1991년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나요?


대학 4학년 96년 후배들과 이곳저곳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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