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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그 위대한 시작과 씁쓸한 변주곡

민중의 희망이 사이비가 되는 과정까지?

by 자유로운영혼

'동학농민혁명' 하면 뭐가 제일 먼저 떠오르세요? 아마 '민중의 봉기', '외세 저항', '평등사상' 같은 위대한 이미지일 거예요. 저도 그랬어요. 특히 저는 개인적으로 동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는데, 바로 1994년 군 제대 후 후배들과 함께 '동학을 찾아서'라는 답사를 하면서부터였어요. 그 답사를 통해 동학의 흔적을 따라가며 비로소 이 역사 속 움직임이 제게 깊이 다가왔죠. 하지만 깊이 파고들수록 동학은 단순한 '혁명'이라는 단어만으론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다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오늘은 우리가 흔히 알지 못했던, 혹은 외면했던 동학의 이면과, 그 속에 담긴 시대를 초월하는 메시지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해 볼까 해요.


1. 누가 '동학'의 얼굴이 되었나? – 기록이 만든 역사와 정치적 이용


'동학'하면 우리는 단번에 '녹두장군' 전봉준을 떠올려요. 물론 그는 동학농민혁명의 상징이자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에요. 근데 왜 유독 전봉준이 이렇게 유명할까요? 동학에는 전봉준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들이 많아요. 예를 들어 손화중, 김개남 장군 같은 분들이죠.


ㅠㅠ 정말 안타까운 지점인데, 역사는 '기록'의 유무에 크게 좌우되는 것 같아요. 손화중, 김개남 장군은 체포된 후 관군에게 즉결처분을 당했습니다. 재판다운 재판도 없이 잔혹하게 처형되면서, 그들의 말과 행적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요.


반면에 전봉준 장군은 일본군에 잡혀 비교적 '정식' 재판 절차를 거쳤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심문 기록이 남겨졌어요. 이 기록들은 지금도 동학농민혁명을 연구하는 핵심 사료로 쓰이고 있죠. 관군에 의해 잡힌 김개남과 손화중은 전 근대적인 즉결처형을 받고, 일본군에 잡힌 전봉준은 근대적? 재판을 받아 기록이 남게 되는 아이러니입니다ㆍ결국, 역사라는 게 기록된 것을 중심으로 서술될 수밖에 없다는 씁쓸한 현실을 보여주는 단면이에요.


서울 종각의 전봉준 동상


게다가 전봉준 장군은 훗날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했어요. 1980년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전봉준 장군 유적 정화 사업을 지시하며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는데, 당시 전두환 대통령과 전봉준 장군이 '같은 전 씨라서 그랬다'는 풍문이 돌기도 했죠. 물론 단순히 성씨 때문이 아니라, 군부 독재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국민적 지지를 얻으려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합니다. '민중의 편에 선 개혁'이라는 전봉준의 이미지를 자신들의 통치에 활용하려 한 거죠. '체제 저항'이라는 전봉준의 본질적인 측면은 은근슬쩍 가려버린 채 말이에요.

박정희가 이순신장군을 띄우고 선조를 깎아내려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과 맥락이 비슷합니다ㆍ 나는 조선시대 왕 중에 가장 저 평가받고 있는 왕이 선조라고 보거든요! 선조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고창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일대! 94년 답사 할때 정비가 너무 잘 되어 있어 뭔가 찜침했다


2. 동학 지도자의 딜레마 – "식객"과 "복위" 논란


전봉준과 흥선대원군의 관계도 흥미로운 지점이에요. 실제로 전봉준이 한때 대원군의 식객으로 있었다는 기록이 있거든요. 그래서 일부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이 대원군의 복위를 위한 것이 아니었냐는 시선도 있었어요.


하지만 동학농민운동의 기본 목표는 탐관오리 척결과 민중의 삶 개선이었죠. 전봉준은 1894년 2월 15일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맞서 1차 봉기를 주도했습니다. 대원군 측에서는 동학군과의 밀통을 시도했고, 대원군을 섭정으로 복위시킬 것을 약속했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정작 전봉준 본인은 대원군과의 관계에 대해 명확한 언급을 피했어요.


두 사람은 각자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서로를 이용하려 했을 가능성이 커요. 전봉준은 민중을 위한 개혁을, 대원군은 자신의 권력 회복을 꿈꿨던 거죠. 같은 적(명성황후와 민 씨 세력)을 가졌기에 일시적으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을 수는 있지만, 봉기의 주된 목적이 대원군 복위였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3. 일진회, 그리고 이상이 변질되는 길


동학에서 파생된 일진회도 '초기의 생각과 달리 다르게 흘러간'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어요. 일진회는 동학의 핵심 인물이었던 이용구가 주도해서 만든 친일 단체인데, 처음부터 대놓고 친일을 표방했던 건 아니었을 거예요. 동학농민운동 이후의 혼란 속에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일부 '개혁'적인 주장을 내세우기도 했죠. 이용구라는 인물도 나름 흥미로운 변화 과정을 살게 되는데 그건 다음 기회에!


하지만 결국 강력한 일본의 압력 앞에서 자신들의 초기 이념은 뒷전으로 밀리고, 개인의 영달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 친일이라는 비극적인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수많은 동학 신도들이 일진회에 가담하기도 했으니, 당시 사람들의 좌절감, 혼란, 그리고 타협 심리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죠.


4. "모든 인간은 곧 하늘이다!" – 하지만 이면에는 신분상승 욕구와 사이비적 변질의 씨앗도?


동학의 핵심 사상은 '인내천(人乃天)', 즉 '사람이 곧 하늘이다'였어요. 또 '시천주(侍天主)', '한울님을 모신다'는 구호 아래 모든 인간의 평등을 주장했죠. 조선 후기의 뿌리 깊은 신분 차별 속에서 이 메시지는 얼마나 혁명적이고 희망적이었을까요? ㅠㅠ 당연히 억압받던 민초들은 열광했습니다.


근데 말이죠, 동학이 퍼진 방식에는 이런 순수한 이상 외에 인간의 현실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측면도 있었다는 거, 알고 계셨나요? 당시 동학은 '포(包)', '접(接)' 같은 독자적인 조직 체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여기에 가입해서 열심히 포교 활동을 하고 교세를 확장하면 신분과 관계없이 높은 직책을 얻을 수 있었다는 거예요!


조선 후기는 신분제가 동요하고, 양반 신분을 돈 주고 사는 일도 흔했을 만큼 신분 상승에 대한 열망이 엄청났던 시기였어요. 이런 상황에서 동학은 그야말로 '새로운 판'을 제시한 셈이죠. 이상적인 평등 사회를 꿈꾸게 하면서, 동시에 현실적인 출세의 길도 열어준 겁니다. 동학에 왜 그렇게 많은 평민과 천민들이 목숨 걸고 뛰어들었는지 이해가 되는 지점이죠?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건, 이런 포교 방식이 오늘날 몇몇 신흥 종교들의 모습과 놀랍도록 닮아있다는 점이에요.


증산도, 통일교, 신천지 등 현대 사회의 많은 신흥 종교들도 초기에 사회의 소외된 이들이나 기존 질서에 불만을 가진 이들에게 '새로운 세상', '인간 평등', '궁극적인 구원' 같은 메시지를 던지며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리고 그 조직 내에서 적극적인 활동과 포교에 대한 보상으로 높은 지위나 특별한 '깨달음'을 약속하기도 합니다. 현실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이들에게 새로운 '신분'과 '소속감'을 부여하는 셈이죠.


하지만 동학이 그랬던 것처럼, 이런 종교들의 내부에서도 초기의 순수한 이상이 변질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나요. 바로 **'교주의 신격화'**라는 문제인데요. '하늘님을 모신다'는 동학의 사상이 자칫하면 '본인이 곧 하늘'이라고 주장하는 교주의 절대화로 이어질 위험성을 품고 있는 거죠. 증산도나 신천지처럼 교주가 스스로 '상제', '재림 예수', 또는 '하늘'을 자처하며 신도들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모습은, 이러한 초기 종교의 특성이 극단적으로 발현된 형태라고 볼 수 있어요.


마무리하며:


동학농민혁명은 우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대한 사건이에요. 민중이 주체가 되어 사회를 바꾸려 했던 최초의 시도였고, 그 정신은 지금도 우리에게 많은 울림을 줍니다. 하지만 동학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면, 이상과 현실, 희망과 좌절, 그리고 인간의 복잡한 욕망이 뒤섞여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도 하고, 기록된 것만 전해지는 한계도 있죠. 또 시대의 혼란 속에서 얼마나 많은 순수한 이상들이 좌절되고 변질되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눈 이 이야기들이 동학을, 그리고 역사를 좀 더 깊이 있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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