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 vs 실리, 그 숨겨진 이야기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히 접했던 조선 왕들의 모습이 사실과는 조금 다를 수 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보려 해요. 특히 '명분'과 '실리', 이 두 가지 키워드를 통해 왕들의 진짜 고민과 그 시대 사람들의 시선을 함께 들여다볼 거예요. 우리가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명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느끼는 것처럼, 조선 시대에도 그랬거든요!
선조: 비난받아 마땅한 왕이었을까?
우리는 흔히 선조를 임진왜란 중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무능하고 겁 많은 왕, 심지어 이순신 장군을 질투해 내쳤던 소인배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를 깊이 들여다보면 다른 평가가 가능합니다. 특히 현대에 들어 선조가 낮게 평가되는 데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기 이순신 장군을 국가적 영웅으로 부각하면서 상대적으로 선조의 위상이 축소되고 평가절하된 측면도 큽니다.
- '겁 많고 무능하다?' - 사실은 현명한 선택!
당시 17만 일본군이 조총 부대를 앞세워 20일 만에 한성을 함락했을 정도로 전세는 불리했습니다. 만약 선조가 도망가지 않고 한성에 남아 사로잡혔다면, 왕의 항복은 곧 나라의 멸망을 의미했을 것입니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피난을 결정한 것은, 왕의 목숨을 보전하여 국가의 구심점을 지키려 했던 '지극히 실리적'이면서도 '현명한' 선택이었습니다. 왕으로서 국가의 존속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던 그의 실리적 판단은, 결과적으로 나라의 명운을 지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또한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위기 속에서 단행된 '분조(分朝)' 결정은 선조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줍니다. '분조'는 왕(선조)이 의주로 피난 가는 길에 세자(광해군)에게 군사와 백성을 맡겨 남쪽에서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도록 한 것입니다. 권력의 생리상 부자간에도 나누기 어려운 것이 바로 왕권입니다. 태종이나 영조처럼 왕권이 강했던 시기에도 아들에게 실권을 온전히 내주기보다는 훈계하고 통제했던 역사를 보면, 왕이 국가적 위기 속에서 권력을 나누어 아들에게 위임한 '분조'는 아차 하면 역모로 변질될 수 있는 지극히 위험하고도 파격적인 결단이었습니다. 이는 혼란한 시국을 수습하고 국난 극복에 매진하고자 했던 선조의 책임감과 상황 판단 능력을 보여주는 대목으로서 높게 평가되어야 합니다.
- '이순신을 질투했다?' - 인재를 알아보는 눈과 정치적 고뇌!
이순신은 원래 '행감' 벼슬에 있었으나, 선조에 의해 '군수'로, 그리고 다시 7등급을 파격적으로 올려 '통제사'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처럼 선조는 필요한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있었고, 과감하게 발탁하여 승진시킨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원균'은 이순신보다 5년이나 연상인 선배였기에, 후배인 이순신이 통제사가 되면서 두 사람 간의 갈등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선조가 이순신을 백의종군시킨 것은 단순히 질투 때문이 아니라, 이처럼 이순신과 원균 사이의 풀리지 않는 극심한 반목을 해결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습니다. 당시 선조가 신임하던 이덕형 같은 대신들도 이순신의 역량이 원균보다 떨어진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고요. 백의종군이 '대기발령'과 같은 개념이었다는 점에서, 나중에 다시 기용할 여지를 남겨둔 정치적 판단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숨겨진 리더십:
선조는 검소하고 학문에 뛰어났으며, 율곡 이이, 유성룡 등 조선 시대 가장 많은 인재를 배출한 시대를 이끌었습니다. 특히 붕당정치를 현실화시킨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붕당은 지금의 정당과 비슷하게 뜻을 같이하는 이들의 정치 집단인데, 왕의 친척으로서 힘이 약했던 선조는 붕당을 이용해 정치를 안정적으로 이끌었습니다. 백성들이 정치가 치열하게 대립할 때 오히려 더 잘 살았고, 정쟁이 사라지면 독재가 시작되어 나라가 망했던 역사를 생각하면, 선조의 붕당정치는 '실리'를 가져온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광해군과 중립 외교의 진실: 과대평가된 왕의 그늘
광해군 때 중립 외교를 펼쳤다고 하여 그를 높이 평가하는 시각이 많지만, '중립 외교'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실제 존재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저는 광해군의 '중립 외교'는 허상에 가까웠다고 생각합니다.
내치 파탄: 백성은 없고 사욕만 있었다
광해군 시대는 내치의 파탄으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잡채 판서 더덕 정승"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을 정도로 **매관매직(賣官賣職)이 심화**되었고, 관직이 뇌물로 거래되면서 국가 기강은 심하게 문란해졌습니다. 궁궐 내시들의 입김이 막강해지며 이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진귀한 잡채나 더덕을 바쳐 관직을 얻는 일까지 벌어졌죠.
여기에 왕의 총애를 등에 업은 김개시(개똥김 씨) 같은 **측근들의 권력 남용과 국정 농단은 극에 달해**, 조정의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이러한 부패는 민생을 돌봐야 할 관리들이 오로지 개인의 영달만을 추구하게 만들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의 고통으로 이어졌습니다.
광해군은 전쟁을 피했다고 하지만, 정작 대규모 토목 공사를 무리하게 강행하여 백성들을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백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외세와의 전쟁을 피했다고 하면서, 정작 백성의 삶을 도탄에 빠뜨린 내치는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적인 해석입니다.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지도 않은 상황에서 무분별한 궁궐 중건과 과도한 사치는 백성들의 지탄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꼼수' 외교의 허상: 국제사회는 만만하지 않다
광해군이 전쟁을 피하고자 했던 진짜 이유는 백성을 위한다는 대의보다, 임진왜란 당시 풍찬노숙했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전쟁의 고통과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국제 정세에서 이러한 '꼼수'는 결코 통하지 않습니다.
만약 광해군이 '중립'이 아닌 명확한 전략으로 임진왜란 참전의 대가로 맺어진 명나라와의 관계를 재정립하거나, 후방을 교란하는 등 적극적인 외교적 혹은 군사적 대응을 했다면 역사의 양상이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당시 청나라(후금)는 아직 소수 민족 기반이었고 명나라는 여전히 대국이었기에, 전쟁의 결과를 예측하기란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강홍립 부대가 허무하게 청나라에 항복하면서 청나라는 명분과 실리를 모두 얻었고, 이는 곧 명나라의 멸망을 촉진하는 빌미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청이 조선을 압박하는 명확한 근거를 제공했습니다.
명나라가 멸망한 후 청나라가 조선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을 리 만무합니다. 어차피 벌여야 할 싸움이었다면, 차라리 광해군 때 명확한 명분을 가지고 싸우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광해군은 그저 전쟁을 피하고 싶어 했을 뿐이며, 임진왜란의 고통을 망각한 채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안이한 통치를 이어간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실리 외교'라고 포장하지만, 이는 사실상 **'양다리 외교'**에 불과합니다. 국제사회에서 진정한 '중립 외교'는 강대국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을 수 있는 압도적인 힘이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박근혜 정부 시절을 떠올려보세요. 중국의 요구에 천안문 열병식에 참석하고, 미국의 요구에 사드 배치를 결정했으며, 일본의 요구에 위안부 합의를 해주었습니다. 하자는 대로 다 했지만, 결국 국민의 지지를 잃고 탄핵을 당했습니다. 이는 명분을 잃은 외교가 아무리 실리를 내세워도 국민적 지지를 얻을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유럽 역사에서도 유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때, 나폴레옹이 포르투갈을 치기 위해 스페인에 길을 비켜달라고 했을 때 스페인은 이를 허용했습니다. 전쟁을 피하려던 스페인의 선택은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프랑스군은 스페인을 침략하여 나폴레옹의 동생이 스페인을 지배하게 되는 더 큰 화를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전쟁은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해야 할 시기가 오면 감당해야 하는 숙명과 같습니다.
광해군의 복권이 없었던 이유: '명분'의 힘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광해군만은 조선 시대에 복권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사육신과 더불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던 단종도 단종을 죽였던 세조의 후손들에 의해 복권되었고, 심지어 조선 건국에 반대했던 정몽주도 복권되어 유교적 성인으로 추앙받았습니다. 만약 광해군이 진정으로 백성과 나라를 위했고, 그의 중립 외교가 옳았다면, 후대에라도 반드시 복권이 되었을 것입니다. 재위 기간이 24년으로 결코 짧지 않았음에도 그가 복권되지 않았다는 것은, 당대 사람들은 물론 후대의 조선인들조차 광해군을 올바른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명분을 잃고 내치마저 엉망이었던 광해군을 드라마나 영화가 소재로 삼아 역사적 사실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왜곡하는 것은 바로잡아야 할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한국 역사학계나 특정 진보진영, 그리고 예술계에서 광해군을 높이 평가하는 시각은 바로 잡아야 합니다ㆍ
정조: 개혁 군주라는 이미지와 보수성
정조 역시 '개혁 군주'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이 또한 후대 백성들의 '만약 정조가 오래 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염원이 투영된 측면이 커요.
'정치적 도구'로 활용된 인재들!
정조는 물론 학문에 뛰어났고 많은 책을 읽은 왕이었지만, 정치 면에서는 아쉬움이 있었어요. 남인을 기용해서 당파 간의 균형을 맞추려 했지만, 이들을 **'필요할 때만 쓰는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의외의 보수성과 놓쳐버린 '실리'!
가장 의외였던 점은 그의 **'보수성'**이에요. 당시 유행하던 박지원의 '연암체' 같은 구어체 문체를 매우 못마땅해해서, 연암체를 쓴 사람들에게 반성문을 쓰게 하고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할 정도였죠. 심지어 박지원도 반성문을 썼다니, 깐깐함의 극치였어요.
왕의 '뒷거래 정치'와 공론 정치의 붕괴:
정조의 가장 논란이 되는 면모는 바로 **'뒷거래 정치'**입니다. 노론 벽파의 거두였던 심환지와 주고받은 무려 299통의 비밀편지(밀찰)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편지에서 정조는 신하들에게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너는 저런 말을 하라"는 식의 **정치적 '각본'**을 전달하며 미리 정국을 연출하고 조종했습니다. 또한 홍국영처럼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해 정적을 제거하고 이용하다가, 그마저도 위협이 되자 가차 없이 제거하는 냉혹함을 보였습니다.
조선 시대는 왕과 신하의 독대마저 금지하며 **공론 정치**를 기본으로 삼았습니다. 모든 정치는 투명하게 공개된 자리에서 신하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명분을 중시했습니다. 이런 원칙에 비춰볼 때, 정조의 '뒷거래 정치'는 공적인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사사로운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한 **'기본이 없는' 행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정조의 재위 기간은 24년(1776년 ~ 1800년)으로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이 기간 동안 왕 스스로가 '꼼수 정치'의 전례를 남겼다면, 신하들은 공개적인 공론보다는 왕의 비위를 맞추거나 비밀 통로를 통해 권력을 추구하는 방식을 학습했을 것입니다. 왕의 카리스마와 역량으로 유지되던 이런 시스템은 그가 승하하자마자 유지될 수 없었습니다. 정조 사후 조선이 **'세 도 정치'라는 암흑기**에 바로 돌입한 것은, 정조의 개혁이 **왕 개인의 역량에 지나치게 의존했지,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했음을 증명**합니다. "정말 정조가 개혁이 맞았다면, 그 후 바로 세도 정치로 조선이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은 그의 통치 방식이 가진 본질적인 한계를 정확히 짚어냅니다.
더욱 아쉬운 건 서학(서양 학문)을 받아들이지 않은 점이에요. 서학은 단순히 천주교가 아니라 서양의 발달된 과학 기술과 문물을 포함하고 있었어요. 당시 조선의 국력이 비교적 강했던 시기에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더라면, 일본보다 훨씬 빨리 근대화할 기회가 있었을지 몰라요. 하지만 정조는 이를 거부했고, 결국 조선은 고종 때 국력이 쇠한 상태에서 개방을 맞이해 붕괴로 이어지는 비운을 겪게 되죠. 이는 '명분' 혹은 기존 체제 유지를 위해 장기적인 '실리'를 놓친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평가할 때, 결과만을 두고 '스텝이 꼬였다'라고 비난해서는 안 돼요.
단순한 선악 구도를 넘어, 그 시대의 '명분'과 '실리'라는 잣대, 그리고 당대 사람들의 시선까지 고려할 때 비로소 인물들의 진짜 모습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도 유교적 정치의 명분에 뿌리박고 있다
우리는 종종 '정치는 먹고사는 문제'라고 말하지만, 대한민국은 결코 '실리'만으로 리더를 평가하지 않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 개발, 전두환 전 대통령의 3저 호황,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북방 정책 등 눈부신 경제적 성과나 외교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집권 과정에서 '명분'과 '정의'를 상실했기에 우리는 이들을 독재자나 학살자로 취급합니다. 박정희는 유신 체제로, 전두환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으로, 노태우는 12.12 군사 반란과 5.18 진압에 가담하며 명분을 잃었고, 그 결과는 지금도 국민적 심판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정치에서 명분과 정의를 잃으면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점을 현대사를 통해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면, 2차 세계대전 후 경제 성장만 되면 모든 것이 용인되는 것처럼 보였던 일본은 자민당이 오랜 기간 집권하며 상대적으로 정치적 '명분'에 대한 깊은 논의가 부족한 경향을 보입니다. 또, 중국은 대약진 운동, 문화 대혁명, 천안문 사태 등으로 수천만 명이 희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경제성장이라는 '실리'만을 앞세워 모든 독재와 폭력을 용인합니다. 심지어 중국 화폐에는 여전히 마오쩌둥의 얼굴로 가득 차 있죠. 이는 오로지 경제 발전만이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극단적인 '실리' 지향 사회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대한민국이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민주주의가 이토록 탄탄한 복원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명분과 정의'를 중시하는 유교 정치의 뿌리 깊은 전통 덕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적 명분론이 지금보다 훨씬 더 강력했으니, 왕의 정치적 선택들이 당시 백성과 사대부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 짐작이 되지 않나요?
그러니 우리가 조선 시대의 정치 질서를 단순한 '당파싸움'이나 '케케묵은 명분론'으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깊은 뿌리를 이해하기 위해 다시 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