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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박한 반항, 혹은 생의 균형에 대한 단상

by 자유로운영혼

나는 참 소박하고 성실한 사람이다. 술, 담배, 커피, 낚시, 골프, 축구, 등산… 그 어떤 것에도 딱히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남자들이 흔히 돈이 생기면 크고 비싼 차를 바꾸고, 명품 옷을 입고 골프장으로 향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내게는 아무런 감흥도 없는 일들이다. 하고 싶은 것이 많고 새로운 것에 흥미를 가져야 진보적인데, 나는 물질적인 면에서는 무척 보수적이다. 이렇게 물리적, 현실적인 삶은 너무나 보수적이다.


반면 내 정신세계는 언제나 극단을 향해 치닫는다. 영화나 소설, 이론 같은 것을 극단으로 밀어붙여 끝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내 머릿속은 한 번 뻗어나가면 안드로메다로 향한다. 인간은 늘 균형을 맞추려 하는 듯하다. 상수도가 있으면 하수도가 있듯이 말이야.


20대, 30대 시절에는 이런 이치를 몰라 때로는 너무 착하고, 때로는 너무 과격하게 격렬히 오가며 나 스스로 딜레마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40대가 넘어서며 이 극단적인 정신세계와 현실적인 삶 사이의 균형을 삶 속에 적당히 욱여넣을 수 있게 된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97년 대전산업 공단에 있는 만도? 파업 당시, 새벽에 만도 노동자들과 파업 투쟁에 함께하고 들어왔다는 하숙생 후배에게 난 "공부 열심히 해서 만도에 입사하는 것이 지금 네가 할 일"이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현실적이었다. 서울대 연고대생들이 하는 위장 취업이 아닌, "공부 열심히 해서 자격증이라도 하나 따서 만도보다 못한 공장이라도 입사하는 것이 당장 해야 할 일"이라고 후배에게 충고했다. 군대 제대 후 내가 그랬지. 그런 자세로 살다보니 철도청 기능직 10급으로 입사한 것 같다 .정년이 보장되는 철도에서 승진에 신경 쓰지 않고 적당히 일하며 눈치껏 요령을 부려도 민폐가 되지 않는, 지극히 보수적인 삶에 편안함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노조활동도 하면서 적당히 일탈도 할 수 있고 말이다. 내가 당구나 골프 같은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타고난 운동 신경이 없는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경쟁에 나를 노출시키는 것이 불편해서다.


남들 학교 다닐 때 학교 다니고, 공부할 때 공부하고, 취업할 때 취업하고, 데모할 때 데모하고, 결혼할 때 결혼했다. 아들 하나, 딸 하나, 정년 보장 직장, 적당한 월급. 부모님 돌아가시고 많은 돈은 아니지만 적당히 상속도 받았다. 정말 보수적이고 지극히 보편적인 삶을 살아가는 나에게 늘 반항과 자유, 일탈은 머릿속에 있거나 제한된 범위 내에서 이루어졌다. 회사에서는 승진이나 급여에 큰 관심이 없다. 노력한다고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니고, 승진한다고 남다른 일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아서다. 그렇다고 신경을 안 쓴다고 봉급을 적게 주는 것도 아니고, 매년 호봉은 올라가고 나이는 꼬박꼬박 한 살씩 더 먹어간다. 나를 완전히 파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펼쳐지는 나의 '소박한 반항'이다. 요즘에는 나를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을 메타인지라고 하던데, 이건 전형적인 소심한 남자의 소박한 생활과 사사로운 반항인 셈이다.


나의 사사롭고 소심한 지적 반항에 대해


대학 다니던 시절, 전공은 기계공학이었지만 사회 과학이나 소설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사회 과학보다는 소설을 좋아했지. 친구들은 소설책을 사서 읽는 나에게 한 번 읽는 책을 왜 사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고, 이론서보다 소설이나 시를 좋아하는 나에게 '나약한 낭만주의'라는 딱지를 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론서보다 소설이나 시가 좋았고, 지금처럼 도서관이 개방적이지 않아서 사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읽지 않고 소장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지적 허영을 채울 때가 있었다.


그중에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너무도 도발적이었다. 나 같은 샌님에게는 내용보다는 그저 제목이 '간지'가 났다. 김영하 작가의 데뷔작인 장편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삶의 의미, 그리고 인간의 존재론적 고뇌를 파고든다.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는 독특한 직업을 가진 '자살 안내인'이다. 그는 죽음을 원하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마지막을 돕는다. 의뢰인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마감할 수 있도록 '안내'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글을 쓴다. 소설은 삶의 의미를 되묻고, 인간 내면의 욕망과 파괴성을 냉철하게 들여다본다. 소설의 제목은 궁극적인 자유와 주체성의 표현, 허무주의와 실존주의적 관점, 그리고 내면의 파괴적 욕망을 내포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프랑수아즈 사강


그리고 시간이 흘러 30대에는 일본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깊은 여운을 주었다. 요즘도 한국 영화보다는 일본 영화가 내 개인 취향에 더 맞는 듯한데, 이 영화가 그 첫 시작이었다. 일단 우리나라 영화에 조금이라도 들어가는 신파가 전혀 없었다. 건조하지만 촉촉하고, 밋밋하지만 끈적거리는, 그러나 질척거리지 않고 산뜻했다. 세 번 이상 본 것 같다. 보다 보니 영화의 여주인공이 좋아하는 작가가 프랑수아즈 사강이었다. 검색을 해보니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말을 법정 재판에서 한 프랑스 작가였다. 김영하가 제목으로 차용했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여주인공 조제는 프랑수아즈 사강을 좋아한다. 사강의 작품들은 사회적 통념이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추구하는 인물들을 다루는데, 다리가 불편하여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조제에게 사강의 소설 속 인물들은 대리 만족과 함께 현실의 답답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방감을 주었을 것이다. 또한 사강의 문체는 간결하면서도 깊은 감성을 담고 있어, 세상을 이해하고 싶지만 직접 경험하기 어려운 조제에게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가 되었을 수 있다. 조제에게 사강의 작품은 단순한 읽을거리 이상으로, 삶의 일부이자 정신적 지주와 같은 존재였다.


카뮈의 질문, 그리고 나의 삶: 지적 방황과 현실의 조화


그래서 사강에 대해 알아보았다. 소설도 읽어 보았으나 프랑스 소설, 특히 실존주의 소설은 너무 난해했다. 카뮈의 『이방인』처럼! 프랑수아즈 사강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고 말한 배경과 의미는 다음과 같다. 이 발언은 사강이 마약 복용 혐의로 법정에 섰을 때 한 말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녀는 당시 법정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발언은 개인의 자유와 선택의 존중, 허무주의와 실존주의적 태도, 그리고 사회적 통념에 대한 저항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알제리계 프랑스인 카뮈는 "인간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세상에 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삶의 의미를 가족에서 찾는 것도 아니며, 좋아하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같았다. 나의 지적 방황은 끊임없이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지만, 나의 물리적 삶은 꿋꿋하게 현실을 살아낸다. 나는 열심히 출근하고, 돈을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잔업을 마다하지 않으며, '놀면 뭐 하나한 푼이라도 벌어야지' 하는 생각인지는 몰라도 돈 벌고 있을 때가 가장 심리적으로 안정된 상태이다. 이 부조리함을 메우지 못하는 나는 남들이 보면 그저 속물일 뿐이다. 사실 그런지도 모르겠다. 나보다 남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더 정확한지도.


딸과 일요일 점심을 먹으며 카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알제리 출생부터 『이방인』을 거쳐 자살하지 않는 이유와 47세에 교통사고로 죽은 죽음까지, 그리고 사르트르보다 일찍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이야기까지. 딸의 반응은 "인간은 말한 대로 사는 거라며 자살 이야기 하고 그래서 일찍 죽은 거"란다. 역시 나보다 훨씬 시니컬하고 냉정하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하는 충고, "죽고 싶지 않으면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라고.


요즘 상갓집에 가끔 가게 된다. 나는 결혼식에는 아예 가지 않고 상갓집에는 가끔 간다. 우리 나이에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경우는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가끔 동료나 후배, 그리고 동료 부인이 돌아가시는 경우가 있다. '벌써' 하는 생각과 동시에 '그럴 나이가 되어간다'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우리 엄마도 55세에 대장암 판정을 받고 5년 동안 병원 치료를 받으시다가 돌아가셨다. 딱 내 나이다. 나는 65세 넘어서 암이나 병에 걸리면 치료할 생각이 없다. 아프면 진통제 맞고 죽음을 받아들일 생각이다. 근데 국민연금이 65세부터 지급된다고 하니 65세가 이른 나이 같기도 하다. 지금 생각은 그렇다. 65세쯤 되면 세상에 할 일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보고 싶은 것도 없으며, 볼품없는 나를 누구에게 보여주는 것도 꺼림칙할 듯하다. 지금도 딱히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이러다가도 막상 암이나 불치병에 걸리면 오만가지 방법을 써서 살려고 한다고는 한다. 계획은 계획일 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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