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사무라이" 사이고 다카모리, 그리고 메이지 유신
2015년 직장 동료들과 일본 도쿄 여행을 준비하며 우에노 공원을 검색하다가,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있는 푸근~해 보이는 배불뚝이 아저씨 동상을 보신 적 있으신가요? 저 역시 그랬습니다. "저건 누구 동상일까?" 동상이라면 영웅을 표현한 것일 텐데 전혀 그런 모습이 아니었거든요! 처음엔 "어? 왜 이런 아저씨 동상이 있지?" 싶어 찾아보니, 그 인물이 바로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라는 일본 역사 인물이었죠. 그리고 그를 이해하기 위해 "메이지 유신"이라는 대변혁까지 파고들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만든 메이지 정부에 대항하다가 죽음을 맞이한 "반역자"이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왜 일본인들은 그를 "영웅"으로 기억하고 있을까요? 이 모순적인 "동경" 속에는 일본 근대사의 복잡한 속살이 숨어 있습니다. 사이고 다가모리 이야기를 풀어보기 전에, 먼저 메이지 유신이 일본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건이었는지부터 알아보는 게 도움이 될 듯합니다 ㆍ
"메이지 유신, 일본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했나?"
- 운명을 바꾼 대변혁
이 메이지 유신은 일본 역사에서 정확히 얼마나 중요한 사건이었을까요?
메이지 유신은 1868년(조선은 흥선대원군 섭정시기)에 시작된 일본의 "전대미문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자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은 대변혁"이었습니다. 260년 이상 이어진 봉건 막부 체제를 해체하고 천황 중심의 중앙 집권적 근대 정부를 세웠죠.
이 유신을 통해 일본은 봉건 사회에서 근대 국가로 빠르게 변모했습니다. 신분제 철폐, 의무교육, 징병제 도입 등으로 "근대 국가의 기반"을 구축했고, 지조개정을 통해 재정 안정과 "급속한 산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무엇보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고, 오히려 "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근대 산업국가"로 성장하게 한 결정적 요인입니다. 이 힘으로 일본은 동아시아 강대국으로 부상했습니다. 메이지 유신이 없었다면 오늘날 일본의 모습은 크게 달랐을 것입니다.
"유럽 문명 이외의 국가에서 자발적 근대화를 이룬 유일한 나라가 일본"이라고 평가되기도 합니다. 물론 일본을 우습게 비웃고 얕보는 세계유일한 나라가 대한민국이기도 하지요!
자, 그렇다면 이렇게 막대한 변화를 이끌어낸 메이지 유신의 중심에는 과연 어떤 인물들이 있었을까요? 수많은 주역들 가운데, 특히 제가 흥미를 가지고 깊이 파고든 세 명의 인물들을 소개해 드립니다.
도쿄관광?을 앞두고 메이지유신에 대해 책을 읽고 공부해서 현장에서 설명하려고 했으나, 다들 흥미가 없는지 내가 재미가 없게 설명해서 그랬는지 혼자 웅얼거리다가 만 것을 지금 이렇게 브런치에 쓰게 된 것이 감계 무량합니다ㆍㆍㅎㅎ
"주인공 1: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 무인의 혼을 가진 비극적 영웅
네, 바로 그 우에노 공원의 친근한 아저씨가 사이고 다카모리입니다. 그는 봉건 막부 체제를 무너뜨리고 근대 일본을 세우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군사적 리더"였습니다. "유신 삼걸" 중 한 명으로, 막부군과의 싸움에서 신정부군을 이끌고 승리를 쟁취했죠.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늘 "사무라이 정신"이라는 무인의 혼이 살아 숨 쉬었습니다. 메이지 정부가 새로운 시대를 위해 사무라이 계층을 해체하고 폐도령을 내리는 등 "급진적인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자, 그는 이에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그는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자신의 신념이 꺾이자 결국 정부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죠.
그리고 1877년, 뜻을 같이하는 사무라이들을 이끌고 정부에 대항하는 "세이난 전쟁"(西南戦争)을 일으켰으나 패배하고 할복합니다. '스스로가 만들어낸 새 시대'에 '자신이 상징하는 옛 시대'가 쓸쓸히 사라지는 순간이었죠. 이 때문에 그를 "마지막 사무라이"("The Last Samurai")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혹시 "라스트 사무라이"라는 톰 크루즈 나오는 영화 보셨나요? 그 영화가 바로 이 세이난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했지만, 당시 사무라이들이 느꼈던 시대적 고뇌와 변화에 대한 저항을 잘 묘사하고 있죠.
"왜 그는 '모순적인' 영웅일까요?"
사이고의 죽음 이후, 일본 정부는 그를 "복권"시키고 영웅으로 추앙했습니다. 왜일까요?
- "혁혁한 초기 공헌": 그의 메이지 유신 초기 공헌은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요.
- "비극적 영웅":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위한 '성장통'으로 그의 비극적인 최후를 해석하며, 사라져 가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인물로 승화시켰습니다.
- "인간적인 매력": 그는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서민들과 가까웠던, '인간미 넘치는' 지도자였습니다. 동상의 친근한 모습처럼 대중에게는 '고뇌하고 희생한 영웅'으로 각인된 것이죠.
결국 사이고는 일본인들에게 '시대를 초월한 순수한 신념의 화신'이자, 변화를 수용하면서도 과거의 정신을 잃지 않으려는 일본인들의 복합적인 정서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아마 많은 분이 공감하시겠지만, 사이고 다카모리 같은 인물은 우리나라 같으면 동상까지 세워가며 영웅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국은 "국가에 대한 대의와 충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정의로운 대의"를 따른 인물을 더 영웅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거든요. 사이고의 행동은 아무리 신념 때문이었다 해도, "국가 기틀을 잡은 후 내전을 일으킨 것"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에, 한국의 정서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차이가 한 일 양국의 "역사와 인물을 해석하는 정서"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인공 2: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 변화의 씨앗을 뿌린 비전가
사이고와 함께 시대를 주도했던 또 다른 인물이 바로 "사카모토 료마"입니다. 료마는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판을 짰던 "기획자이자 중재자"라고 할 수 있어요. 그는 이토 히로부미와도 교류하며 여러 중요한 인물들에게 사이고 다카모리를 소개해주는 등 인맥을 넓혔고, 새로운 시대에 대한 비전을 공유했죠.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앙숙이었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을 설득해 '삿쵸 동맹'을 성사"시킨 것입니다. 이 동맹이 바로 막부를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군사적 기반이 되었으니, 료마가 없었다면 메이지 유신의 성공은 요원했을지도 몰라요.
또한 그는 '선중팔책'(船中八策)이라는 새로운 정부 형태와 정책 방향을 제시하며, 일본이 나아가야 할 근본적인 틀을 제안했습니다. 아쉽게도 새 시대가 오기 직전에 암살당해 자신이 꿈꾼 일본의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창의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비전'은 오늘날까지도 일본인들에게 큰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주인공 3: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 계급의 벽을 뚫고 근대 국가의 기틀을 세운 설계자
메이지 유신이 성공한 후, 일본의 근대 국가 시스템을 직접 '설계하고 건축한' 인물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흥미로운 지점이 있어요. 이토 히로부미는 사실 "조슈번의 하급 무사" 출신이었답니다. 당시 에도 시대의 일본은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고, 특히 사무라이 계급 내에서도 상급 무사와 하급 무사의 차이는 엄청났거든요.
하지만 메이지 유신은 바로 이런 "봉건적인 신분 질서를 뿌리째 흔들어 놓았습니다." 무사 계급이 해체되면서 그들의 특권이 사라지는 동시에, "오직 능력과 실력만 있다면 누구든 출세할 수 있는 '역동적인 기회'의 시대"가 열린 거죠! 이토 히로부미는 바로 이 파도를 제대로 탄 인물이에요.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젊은 시절 목수 일까지 했었던 그가 "서양 문물을 직접 경험"하며 근대화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특유의 총명함과 뛰어난 학습 능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신분이 아닌 실력으로 메이지 정부의 핵심 요직을 두루 거치며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 시스템을 근대적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일본 "최초의 내각총리대신"이자 "메이지 헌법 제정을 주도"하는 등 명실상부 근대 일본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죠.
이토 히로부미의 인생 역정이야말로 "메이지 유신이 만들어낸 가장 큰 변화, 즉 '신분 상승의 기회'"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위로부터의 개혁이 아니라, 유능한 인재들이 사회의 핵심으로 진입할 수 있었던 사회적 역동성이 바로 메이지 유신의 성공 비결 중 하나였던 거죠.
하지만 한국인에게 이토 히로부미는 너무나 아픈 역사로 기억됩니다. "조선 침략의 원흉이자 초대 조선 통감"으로서 한국의 국권을 강탈하고 식민 통치를 시작했던 인물이기 때문이죠.
다만, 그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일본 내에서 "논쟁적인 시각"도 존재합니다. 안중근 의사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피살된 후, 일각에서는 "그가 죽지 않았다면 조선에 대한 무단 통치가 아닌, 좀 더 온건한 방식의 '보호국' 또는 '자치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흘러갔을 수도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합니다. 이토가 완전한 병합보다는 점진적인 통제와 내실 강화를 선호했다는 해석인데요. 물론 그의 기본 전제는 조선의 '자주권 인정'이 아닌 '일본의 지배'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이 일본 내 강경파의 발언권을 키워 결과적으로 조선에 대한 "더욱 잔인하고 즉각적인 무단 통치를 촉발시킨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네요.
"마무리하며": 역사 속의 '모순'을 대하는 일본의 방식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 그리고 사카모토 료마와 이토 히로부미의 복잡한 면모들을 통해 우리는 일본이 자국의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성공과 실패, 혁신과 전통, 빛과 그림자까지 모든 면을 끌어안고 자국의 서사로 만들어내는 일본의 방식은, 우리가 역사를 대하는 방식과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죠.
한 인물, 한 사건을 이해하려면 이렇게 겹겹이 쌓인 맥락과 관점을 모두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우에노 공원에서 시작된 작은 호기심이 이렇게 구불구불 역사 이야기로 이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