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 다음으로 내가 주목한 사건은 1936년의 2.26 사건'이다. 젊은 군인들이 천황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총리를 포함한 고위 인사들을 살해하려 했던 사건이다.
1930대 전 세계적으로 대공항이 휩쓸던 시기 일본도 경제적으로 힘들어지고 사회는 불안해지고 정치적으로는 부패했었다ㆍ 이때 젊은 군인들이 들고일어난 사건이다.
1: 2.26 사건은 물리적으로 진압되었지만, 그 정서마저 사라지지 않았다.
쿠데타에 실패한 주동자들은 체포되어 엄중히 처벌받았고, 하급 병사들은 가벼운 징계 후 군에 복귀했습니다. 지도부의 물리적인 처벌에도 불구하고, 2.26 사건을 낳았던 '강렬한 개혁 열망', '부패한 현실에 대한 분노', '나라를 위한다는 대의명분 아래 폭력도 불사하는 행동주의'와 같은 정서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일본 사회 남아 불씨처럼 타올랐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2.26 사건의 주동세력은 물리적으로는 처벌되었어도, 그들이 품었던 정서와 지향하는 바를 확대하는 데는 역설적으로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히려 2.26 쿠데타가 실패하면서, 군부 내 '통제파'가 주도권을 장악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황도파'를 숙청하면서 군부의 영향력이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군부는 정치인과 민간인 견제 세력을 제거하고, 정부를 장악했습니다. 결국 2.26 사건은 일본이 군국주의로 나아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이죠.
2: 천황과 국민은 2.26 사건의 정서를 완전히 외면했을까?
공식적으로 쇼와 천황은 2.26 사건을 중대한 반란으로 규정하고 강력히 진압했으며, 국민 여론도 폭력과 혼란에 공포를 느꼈습니다. 저는 사이고 다카모리처럼 '대의를 위해 비극을 맞은 영웅'에 대한 비장미적 공감대가 일본 사회 저변에 흐르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군 내부에서도 황도파는 숙청되었지만 그 정서 자체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죠. 상식 적으로라면 군부 쿠데타 후 군인을 신뢰하지 않고 정치권 중심으로 권력이 이동해야 했지만, 실제로는 군부가 강화되었습니다. 천황 역시 반란군을 처벌했지만 그들이 내세운 '국가 정화'의 목적에는 일부 공감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결국 2.26 사건은 일본이 군국주의로 급속히 전환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군부는 민간 정치 세력을 무력화하고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3: 2.26 사건 이후에도 계속된 정치 폭력과 군부 독단은 무엇을 의미할까?
2.26 사건 주동자들은 처벌되었지만, 그 사건을 낳은 '부패에 대한 분노', '폭력을 통한 개혁 의지', '나라를 위한 하극상' 같은 정서는 군부 내에 여전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일본 총리 암살 등 정치 폭력이 계속된 점도 이를 보여줍니다. 육군과 해군, 장군과 젊은 장교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과 대립은 일본 내부의 복잡성을 드러냅니다.
이런 지점에서 일제강점기 일본이 단일한 대오로, 단일한 목소리를 냈을 것이라는 인식이 실제와 다르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일본도 내부적으로 복잡다단한 정서와 세력, 그리고 치열한 싸움이 있었습니다.
4: 이러한 정서적 맥이 박정희와 미시마 유키오에게도...
일본에서 요인 암살과 같은 정치 폭력이 계속 일어나는 것은, 그 사상적 잔재나 '폭력을 통한 해결'이라는 정서가 사회 저변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저는 이것이 마치 사이고 다카모리를 추앙하는 것과 비슷한, 일본 사회 특유의 '비장미'와 '영웅 서사'를 가진 정서적 흐름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나는 젊은 시절 만주 군에서 복무했던 박정희가 이 이러한 '정서적 맥'에 깊이 공명했을 것입니다. 박정희는 만주국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는데, 이 시기 2.26 사건의 젊은 군인들이 그의 교관 내지 교장, 혹은 직속상관이 되어 이러한 정서들을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군 조직 내에서 공통적으로 공유되던 이러한 '정서' 자체가 박정희의 훗날 5.16 군사쿠데타 와과 그의 통치 철학 형성의 간접적이면서도 핵심적인 배경이 되었을 것입니다.
226 사건의 주동자들은 물리적으로는 사라졌지만, 그들이 대표했던 '정서'는 시대를 건너, 심지어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1925년~1970년 활동)와 같은 60 대년 후대 작가에게까지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시켰습니다. 미시마는 젊은 작가임에도 노벨상후보에 5번이나 올랐으며 60년대 말 일본좌파들과 우파를 대표하여 공개토론을 하기도 했습니다. 미시마는 2.26 사건 주동자들을 일본 전통 정신을 되찾으려 한 '마지막 영웅들'로 미화했고, 그의 소설 《달려라 말》에서 이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으며, 할복자살로 이어진 그의 행동은 2.26 장교들의 '비장한 순수성과 행동주의'를 답습한 '자발적인 의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마무리하며
나는 역사가 단순한 사건들의 나열이 아니라, 그 뒤에는 사람들의 '정서'와 '사고방식'이라는 강력한 흐름이 숨어있다고 생각합니다. '2.26 사건'은 바로 이런 '하극상', '개혁 열망', '폭력적 해결', 그리고 '비장미'와 같은 복합적인 '정서'의 응축이었으며, 저는 이러한 '정서적 맥'이 시대를 넘어 인물들에게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봅니다ㆍ
결국 일제강점기 일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일한 대오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천황과 정치권, 정치권과 군부, 육군과 해군, 장군과 젊은 장교들 사이에서 치열한 싸움과 복잡다단한 정서가 얽혀 2 차세계 대전 말기인 1940년대에는 서로 자멸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권력의 속성상 아무리 잘 못되었다고 인식되서도 멈출 수 없었다. 결국 일본은 2차 세계대전 패전국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