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68 혁명과 시게노부 후사코, 그리고 한국 80년대와의 대화
메이지 유신, 226 사건 그다음은 일본의 68 혁명 '적군파' 이야기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다 보면 왠지 모를 허무와 이질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68 혁명은 일본에도 번졌고, 적군파 아사마 산장 사건을 이해해야만 하루키 소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도 일본의 68 혁명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루키 소설을 읽을 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루키 소설 전반에 이리저리 녹아 있는 일본의 68 혁명을 시게노부 후사코라는 인물을 통해서 시작해 보겠습니다.
그녀를 인터뷰한 책 『적군파』를 읽고, 그녀의 삶과 신념, 그리고 우리의 80년대와는 얼마나 차이가 있고 공통점이 있는지도 흥미로웠습니다.
1. 이상을 향한 순수한 열정, 그리고 혁명가의 길
시게노부 후사코는 1945년,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서던 일본에서 태어났습니다. 젊은 시절 그녀는 사회의 불평등과 모순에 분노했고, 오직 '정의'를 향한 순수한 열정 하나로 학생운동에 투신했습니다. 평범한 삶을 등지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뜨거운 이상을 품고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의 핵심 인물로 서게 됩니다.
일본 국내에서 혁명의 불꽃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낀 그녀는, 더욱 강렬한 믿음 하나로 모든 것을 버리고 머나먼 이국땅 팔레스타인으로 향합니다. '국제 혁명의 기지'를 꿈꾸며,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과 연대하여 '일본적군(日本赤軍)'이라는 조직을 만들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상을 쟁취하려 했습니다. 그녀의 눈에는 오직 혁명의 완성만이 존재했겠지요.
2. 아사마 산장: '총괄'이라는 이름의 피 묻은 비극, 그리고 엇갈린 운명
시게노부 후사코가 이국에서 '혁명'의 깃발을 높이 들었을 무렵, 일본 본토에서는 그녀와 뿌리를 같이했던, 그러나 다른 길을 걷던 젊은이들이 스스로를 파괴하는 참혹한 비극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1972년 2월, '연합적군(連合赤軍)'이 아사마 산장의 한 별장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중 벌어진 '아사마 산장 사건'입니다.
여기서 가장 가슴 아픈 부분은, 경찰과의 대치보다 앞서 발생한 '총괄(総括)'이라는 이름의 내부 숙청입니다. ㅠㅠ '혁명의 순수성을 지키고 대열을 정비한다'는 명목 아래, 동지들이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14명에 달하는 조직원들이 혹독한 폭력과 학대 끝에 목숨을 잃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상을 향해 나아가던 젊은이들이 스스로 가장 잔혹한 가해자가 되어버린, 혁명의 대의가 스스로의 목숨을 갉아먹은 비극이었습니다. TV로 생중계된 아사마 산장 대치극은 일본 사회에 엄청난 충격과 절망을 안겨주었지요.
이즈음 중국의 모택동과 미국의 헨리케신저가 화해분위기로 돌아서자 산장의 적군파들이 당황해합니다.
시게노부 후사코는 이 사건 당시 일본에 없었지만, 아사마 산장의 비극은 그녀가 이끌던 일본적군, 나아가 모든 급진 좌파 운동에 지울 수 없는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혁명'의 대의는 내부의 잔혹성으로 인해 대중의 신뢰를 완전히 잃고 말았습니다.
하루끼소설을 읽다 보면 간접적으로 아사마산장을 언급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모르면 소설의 흐름을 따라가질 못하게 되는 거죠!
3. 잃어버린 대의를 찾아서: 공항 테러로 이어진 절규와 아쉬운 단절
아사마 산장 사건 이후, 일본 적군 운동은 치명적인 비판에 직면했습니다. 외부, 특히 팔레스타인 내부에서조차 연합적군의 잔혹한 행태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이 존재했을 것입니다. '혁명의 순수성'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찾기 힘들었죠.
이런 상황에서 시게노부 후사코는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아마도 그녀는 이미 추락한 '혁명의 대의'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하는 처절한 절규에 가까운 열망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릅니다. 무너진 이상을 다시 세우기 위해, 잃어버린 명분을 되찾기 위해, 그녀는 더욱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1972년 5월, 이스라엘 텔아비브 로드 국제공항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은 어쩌면 그 절박함의 발로였을지도 모른다는 해석도 나옵니다. 훼손된 '혁명적 순수성'을 폭력을 통해라도 만회하려 했던, 비극적인 몸부림이었을까요.
이러한 일본 68 혁명의 양상과 시게노부 후사코의 선택은 우리가 경험했던 한국 80년대 민주화 운동과는 사뭇 다른 지점을 보여줍니다. 양측 모두 청년층이 주도하고 기존 체제에 저항하며 뜨거운 이상을 추구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배경과 전개, 결과에서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일본의 68 혁명은 경제적 고도성장 속에서 자본주의와 권위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을 시도하며 추상적인 체제 전복을 목표로 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세력이 택한 과격한 무장 투쟁과 특히 연합적군의 '총괄'처럼 동료마저 해치는 내부 폭력은 일반 대중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하며 결국 내부 분열과 자멸로 귀결되었습니다. 이는 이상은 뜨거웠으나 구체적인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고립된, 허무와 좌절감이라는 큰 그림자를 남겼습니다. 하루키 소설에서 느껴지는 그 '이질감'은 어쩌면 열정적으로 투쟁했으나 끝내 사회적 동력을 얻지 못하고 소멸한 혁명 세대의 좌절감이 투영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반면, 한국의 80년대 민주화 운동은 군사 독재 정권의 억압이라는 명확한 현실적 배경 속에서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 헌법 수립 등 구체적인 민주주의 쟁취를 목표로 했습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노동자, 종교인, 시민 등 폭넓은 계층이 연대하여 범국민적인 지지를 얻었고, 비록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으나 대규모 대중 시위와 공동체적 연대를 통해 실제적인 민주화를 쟁취하는 결실을 일정 부분 맺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명확한 목표와 폭넓은 대중의 참여가 가져온 성공적인 민주화 사례로 평가됩니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의 당선 그리고 현실정치의의 벽으로 막히자 , 학생운동의 이상과 목표는 현실에서는 한참 미치지 못했고 그 상실감을 그즈음 하루끼의 상실의 시대가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얻는 동력이 된듯합니다.
4. 오랜 도피의 끝, 어머니의 이름으로: 연민의 시선
이후 시게노부 후사코는 오랫동안 세계 곳곳을 떠돌며 도피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2000년, 일본에서 체포되어 수십 년의 옥살이를 시작하게 됩니다.
옥중에서 그녀는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습니다. "사과나무 아래서 너를 낳으려 했다". 이 책은 무장 투쟁의 최전선에 섰던 '혁명가'가 아닌, 무국적자로 세상에 홀로 남겨진 딸 '메이'에게 보내는 절절한 고백이자 참회록입니다. ㅠㅠ 잃어버린 시간과 어머니로서 딸에게 지워준 짐에 대한 아픔, 그 모든 연민이 글자 한 자 한 자에 녹아 있습니다. 한 시대의 격랑 속에 모든 것을 던진 혁명가가 결국 '어머니'라는 가장 인간적인 이름으로 돌아온 순간입니다.
2001년, 그녀는 자신이 이끌던 일본적군의 해산을 선언하며, 더 이상 무장 투쟁의 시대가 아님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2022년, 70대 후반의 나이로 만기 출소하며 다시 사회로 나왔습니다.
시게노부 후사코의 삶은 분명 논란과 비판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를 들여다보면, 이상을 향한 뜨거움과 그 과정에서 겪었던 끔찍한 비극, 그리고 무엇보다 한 인간으로서 감당해야 했던 고뇌와 상실이 공존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녀의 삶과 일본 68 혁명, 아사마 산장 사건을 통해 혁명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인간적 연약함, 그리고 어그러진 이상이 낳는 자기 파괴의 비극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하루키의 소설이 주는 그 묘한 감정선은, 어쩌면 이처럼 복잡다단했던 일본 현대사의 상흔과도 깊은 관련이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