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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시대, 피어날 수 없었던 사랑과 이념의 비극:

: 화요회 세 영혼의 이야기 (조봉암과 토지개혁, 그리고 시대의 비정함)

by 자유로운영혼

어두웠던 일제강점기, 해방의 염원을 품고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싸웠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가슴 아픈 세 분의 이야기가 있어요. 바로 김단야, 박헌영, 그리고 조봉암입니다. 이 세 분은 모두 1920년대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핵심 조직이었던 ‘화요회’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화요회는 칼 맑스의 생일이 화요일이라 지어진 이름이라고 하니, 지금 생각하면 다소 엉뚱하지만, 그 당시엔 그들에게는 진지하고 신념을 담고 있는 조직명이었을 것입니다.


이 세 분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오직 조선의 독립과 평등한 세상을 위해 몸 바쳤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생은 안타깝게도 너무나도 비극적으로 끝이 납니다. 일제의 손에 죽는 것이 아니라, 해방 이후 '동지' 혹은 '같은 편'이라고 믿었던 세력에 의해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당했으니까요.


- 김단야는 스탈린에 의해 '일본의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 박헌영은 김일성에 의해 '미제의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 조봉암은 이승만에 의해 '북한의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해방된 조국에서, 권력이라는 비정한 이름 아래 서로가 서로를 죽인 겁니다. 어쩌면 일제에 의해 죽었다면 ‘독립투사’로서 영웅적인 죽음을 맞이했다고 기억될 수도 있었을 텐데… 이런 허무하고도 잔인한 역사는 우리에게 시대를 초월한 씁쓸함과 안타까움을 안겨줍니다.


비극 속에 피어난 로맨스, 그리고 한 시대의 초상


이 세 분의 이야기 속에는 더욱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숨어있습니다. 바로 박헌영과 그의 첫 번째 아내 주세죽, 그리고 김단야의 기구한 운명이죠.


박헌영과 주세죽은 단순한 부부 이상으로, 혁명의 동지이자 생사를 함께하는 연인이었습니다. 어둡고 위험했던 시절, 서로를 의지하며 불꽃처럼 뜨거운 사랑을 나눴겠죠. 그러나 일제의 잔혹한 감시망을 피할 수 없었던 박헌영이 체포되면서 이들의 로맨스는 비극으로 치닫습니다. 박헌영이 혹독한 고문 끝에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주세죽의 마음은 산산조각 났을 겁니다. 어린 딸을 데리고 홀로 이국땅 러시아로 피신해야만 했던 그녀의 삶은 또 얼마나 고단했을까요.


그 절망의 땅에서 주세죽의 곁을 지키며 유일한 위로가 되어준 사람이 바로, 박헌영의 절친한 동지이자 친구였던 김단야였습니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아픔을 공유하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함께 이야기했을 겁니다. 아마도 비극적인 시대가 만들어낸 피할 수 없는 끌림이었을 거예요. 그렇게 주세죽은 박헌영이 사망했다고 믿은 채, 김단야와 재혼하게 됩니다. 로맨스라기엔 너무나도 슬픈, 어쩔 수 없는 시대의 연가였던 거죠.


결국 박헌영과 주세죽, 김단야, 이 세 사람의 사랑은 격변하는 시대의 한가운데서 서로 엇갈리며 비극적인 서사를 만들고 맙니다. 그리고 훗날, 주세죽에게 대한민국에서 독립유공자 훈장이 추서 되고, 그 훈장을 그녀의 딸이자 박헌영의 딸인 박 비비안나 씨가 대신 수령했다는 기막힌 이야기는 이 기구한 인연의 잔인한 마침표처럼 느껴집니다.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도 공산주의자였고 반현영의 딸이 훈장을 받는다고 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조봉암 선생: 나라의 기틀을 다졌으나 시대의 희생양이 되다


그렇다면, 같은 화요회 출신이었던 조봉암 선생의 운명은 어땠을까요. 그의 이야기는 더더욱 안타깝습니다.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몸담았던 그는,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이승만 초대 내각의 농림부 장관이라는 중책을 맡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해방된 대한민국에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은 바로 농지 개혁이었습니다. 당시 북한은 1946년 3월에 '무상 몰수, 무상 분배' 원칙으로 토지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무상으로 땅을 빼앗아 농민들에게 나눠주니 농민들의 환호는 대단했죠. 이런 북한의 움직임은 남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고, 만약 남한도 토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면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농민들의 지지가 커질 위험이 있었습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조봉암 장관은 '유상 매수, 유상 분배'를 원칙으로 하는 농지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정부가 지주들의 땅을 돈을 주고 사들여 농민들에게 다시 팔되, 농민들은 수확물로 정부에 갚아나가는 방식이었죠. 이 농지 개혁은 단순히 농민들에게 땅을 나누어준 것을 넘어, 6.25 전쟁 당시 남한의 체제를 수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토지 개혁으로 땅을 받은 남한의 농민들은 공산주의 체제에 대항하여 자신의 땅과 재산을 지키려는 의지가 강해졌습니다. 만약 농지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많은 농민들이 공산주의 체제에 동조하여 북한군에게 협력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을 겁니다. 조봉암 선생의 선견지명과 추진력 덕분에 대한민국은 농민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전쟁을 견뎌낼 수 있는 사회적 안정망을 갖추게 된 거죠.


하지만 조봉암 선생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그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기틀을 다진 위대한 공로자였지만, 이후 '진보당'을 창당하고 이승만 정권에 맞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 미운털이 박힙니다. 결국 '북한의 간첩'이라는 허위 날조된 죄목으로 억울하게 사형당하고 맙니다. 자신이 만든 정부에 의해 ‘사법 살인’을 당했다는 것은 정말이지 역사의 가장 잔인한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일제의 감옥과 고문을 버텨낸 위대한 독립운동가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제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라, 해방 후 자신들이 그토록 꿈꾸던 '동지'와 '동족'이라는 이름 아래 비참하게 사라져 갔습니다. 권력과 정치의 비정함이 얼마나 인간의 존엄을 짓밟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슬프고도 처참한 역사의 그림자입니다.


어제저녁 먹으면서 딸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줬더니, 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는 요즘 태어난 걸 다행인 줄 알고 나이도 있으니 더 이상 나대지 말고 조용히 사세요." 란다.

딸의 말씀 따라 나대지 않고 조용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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