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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진실, 두 명의 대통령: 케네디와 닉슨

미국 현대사의 극과 극을 달린 두 얼굴

by 자유로운영혼

미국 현대사를 이야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두 대통령, 존 F. 케네디와 리처드 닉슨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한 명은 짧은 생에도 영원한 젊음의 상징으로, 다른 한 명은 비극적 몰락 속에서도 위대한 외교 업적을 남긴 인물로 기억되죠. 신기한 건, 이 두 인물을 향한 '역사학자들의 평가'와 '대중들의 호감' 사이엔 묘한 간극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1: 영원히 젊은 대통령, 케네디 - 신화인가, 진실인가?


"새로운 프런티어 정신으로 미지의 영역에 도전하자!"


미국 정치사는 종종 예측 불가능한 흐름을 보입니다. 지금은 '자유주의'와 '약자 보호'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민주당이지만, 사실 노예 해방을 이끈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공화당 소속이었습니다. 이처럼 초기에는 흑인들이 링컨의 공화당을 지지했고, 남부 백인들은 민주당에 속해 있었죠. 하지만 세월이 흘러, 역설적이게도 대대로 부유하고 특권층에 속하는 민주당원 케네디가 등장하며 이러한 정치 지형은 큰 변화를 맞이합니다.


1960년, 43세의 젊은 나이로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에 당선된 존 F. 케네디는 젊음과 활기, 그리고 카리스마로 미국 대중을 사로잡았습니다. 할리우드 배우를 능가하는 외모, 31세의 우아한 퍼스트레이디 재클린과 함께 백악관은 빛났습니다.


43세의 대통령과 31세의 페스트레이디! 상상이 되시나요?

참고로, 한국에서는 박정희가 1961년 5.16 쿠데타를 일으킬 당시 43세였고, 그의 2인자 김종필은 35세였습니다. 동시대 지구 반대편에서 이처럼 젊은 리더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특히 김종필 씨는 386 정치인들이 등장하는 2000년대에 주로 하는 말이 "요즘 젊은것들은...." 본인은 35살에 국정 2인자로 행세했으면서 말이지요! ㅎㅎ


다시 미국 이야기로 돌아와, 이처럼 젊고 매력적인 부부의 등장은 미국 정치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달 착륙을 선언하며 미국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고, 냉전의 위협 속에서도 쿠바 미사일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등 그의 등장은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듯했습니다. 그가 1963년 달라스에서 비극적으로 암살당했을 때, 미국인들은 마치 자신들의 꿈과 희망이 함께 사라진 듯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뉴욕 JFK 공항처럼 그의 이름은 곳곳에 남아 영원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케네디가 명문 정치 가문의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민주당원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미지는 서민과 흑인을 포함한 광범위한 대중에게 크게 어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의 특권적인 배경이나 당시 정책적 논란이 될 수 있는 요소들을 상쇄하고 대중적 호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탁월한 이미지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기부입학으로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특권층의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거 운동 내내 '약자를 대변하는 따뜻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능숙하게 구축해 나갔습니다. 그의 매력적인 연설과 '뉴 프런티어'라는 비전은 폭넓은 지지를 얻어내며, 그의 배경이나 여러 한계들을 넘어서는 대중적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가 죽은 후 존슨 부통령이 1964년 민권법 제정의 발판을 마련하며 흑인들의 표심을 민주당으로 완전히 가져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케네디 대통령의 공로로 평가받습니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그의 짧은 2년 10개월 임기를 냉정하게 들여다봅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 해결은 분명 업적이지만, 사실 미국이 터키 미사일을 비밀리에 철수하는 '양보'를 했다는 점, 핵전쟁 직전까지 몰고 간 그의 강경책에 대한 비판도 존재합니다. 또한, 베트남 전쟁의 본격적인 시작은 그의 후임자인 존슨 대통령이지만, 미군 고문단 파견을 대폭 늘려 개입의 씨앗을 뿌린 것은 케네디였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대중적 이미지와 달리 문란한 사생활과 불륜설은 그의 도덕성에 대한 끊임없는 논란을 낳기도 했습니다.


결국 케네디는 대중에게 '비극적인 영웅'으로 기억되지만, 역사학자들에게는 '미화된 신화'와 '짧은 임기 속의 한계'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기도 합니다.



2: 불운한 천재 전략가, 닉슨 - 오명 속의 위대한 업적들!


"나는 더 이상 미국인을 실망시키지 않겠다!"


케네디와 달리 리처드 닉슨은 대중적 인기가 많았던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딱딱하고 고독한 이미지였죠.

하지만 그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는 다르게 엄청난 전략가이자 실용주의자였습니다. 1968년 어렵게 대통령에 당선된 그는 미국을 바꿀 야심 찬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닉슨은 케네디와 정반대의 배경을 가졌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고, 학비를 벌기 위해 힘들게 일했던 가난한 환경의 자수성가형 공화당원이었죠. 그는 엘리트주의와는 거리가 먼 평범한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는 다소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특히 그의 '법과 질서'를 강조하는 정책은 일부 보수층의 지지를 얻었지만, 당시 활발했던 흑인 민권 운동이나 반전 운동 세력에게는 거부감을 안기기도 했습니다. 케네디 시대의 민권법 제정 이후, 남부의 백인들이 민주당을 떠나 공화당을 지지하는 흐름이 생겨나면서, 닉슨은 대중의 '말 없는 다수'에 주목하며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약자보다는 기존의 질서 유지에 더 무게를 둔 듯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의 출신과 이미지 사이의 괴리는 미국의 복잡한 사회 구성과 대중 인식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의 최고 업적 중 하나는 바로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입니다. 오랜 세월 적대 관계였던 공산 중국을 전격 방문하며 '죽의 장막'을 걷어낸 것은 닉슨의 대담한 결정이었고, 이는 냉전 구도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습니다. 소련을 압박하고 냉전을 완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죠.


또한, 1971년 갑작스러운 금본위제 폐지 선언, 이른바 '닉슨 쇼크'는 세계 경제에 충격을 주었지만, 이는 달러의 유연성을 확보하고 미국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달러는 실제로는 금으로 바꾸지 못하지만 믿음의 영역으로 바뀌는 엄청난 변화의 결정입니다.

오랫동안 미국을 괴롭혔던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을 건져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고, '명예로운 철수'를 내세우며 전쟁을 끝낸 것도 그의 끈질긴 협상력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닉슨의 모든 업적은 1974년, '워터게이트 스캔들'이라는 거대한 그림자에 가려지고 말았습니다.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임기 중 사임한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면서, 그의 빛나는 업적들은 대중의 기억 속에서 흐릿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역사학자 vs. 대중의 시선


케네디와 닉슨을 통해 우리는 '역사학자의 평가'와 '대중의 호감', 그리고 '출신 배경과 정치적 이미지의 역설'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여실히 보게 됩니다. 이처럼 60년대는 미국 정치사에서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이념 및 지지층 변화와 같은 복잡한 역동성이 존재해 왔습니다. 한때 흑인의 지지를 받던 공화당 링컨과 달리, 민주당 케네디 시대의 민권 운동을 기점으로 흑인의 표심이 민주당으로, 백인 남부의 표심이 공화당으로 이동한 것도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역사학자는 철저한 팩트와 사료를 기반으로 한 냉철한 분석을 통해 평가합니다. 케네디의 짧은 임기와 한계, 닉슨의 위대한 외교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워터게이트라는 도덕적 실패를 모두 고려해서 '균형 잡힌 시선'을 유지하려 합니다. 때로는 대중의 신화를 깨뜨리며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하기도 하죠.


반면, 대중은 상징, 감정, 스토리에 더 크게 반응합니다. 케네디에게는 '영원한 젊음', '비극적 희생'이라는 스토리가 대중의 마음을 움직였고, 닉슨에게는 '부정적인 정치인'이라는 프레임이 강하게 박혀버렸습니다. 이들에 대한 대중의 호감도는 개인의 가치관이나 미디어를 통해 형성된 이미지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이 둘 중 어떤 것이 '진실'이고 '사회에 긍정적'일까요?


역사학자의 평가는 우리가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특정 인물이나 사건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도록,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시각을 제공하는 나침반과 같습니다. 냉철한 진실을 직시하는 용기를 주는 거죠.


반면, 대중의 호감과 상징성은 우리가 함께 꿈꾸고 나아가야 할 비전을 제시하고, 공동체적 가치를 일깨우는 강력한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역사학자들의 냉철한 분석과 함께 대중의 시선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역사학자들의 평가에 관심은 많지만. 대중의 시선에 조금 더 무게를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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