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비극적인 진보는 과연 계속될 것인가?
최근 인류의 역사를 되짚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실타래를 풀어보니, 겉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흐름 속에서 인간 본연의 모습과 인류가 마주한 숙제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마냥 희망만 이야기하기는 어려운 답답함도 느낍니다.
1. 1차 세계대전: 제국의 영광을 탐했으나, 스스로를 파괴한 왕들의 피의 대가
제가 보기에 1차 세계대전은 분명 왕권 강화를 위한 영토 전쟁이었습니다. 당시 유럽의 거대 제국들은 저마다 황제의 영광과 국가의 위엄을 위해 끊임없이 영토를 확장하려 했지요. 영국과 프랑스가 일찌감치 식민지를 확장했던 것처럼, 후발 주자였던 독일은 더 많은 영향력을 갈망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는 발칸반도에서 서로 패권을 다투었습니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며 불거진 갈등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얽혀 시한폭탄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합병 지역인 사라예보를 방문했다가 세르비아 민족주의 청년에 의해 암살당하는 '사라예보 사건'이 터졌습니다. 이 작은 불꽃 하나가 복잡하게 얽힌 유럽의 동맹 관계에 옮겨붙으면서, 결국 전 세계적인 대전쟁으로 번지게 되었습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참혹한 인명 피해와 경제적 파괴가 유럽 대륙을 휩쓸었지요.
이 전쟁은 각국에 돌이킬 수 없는 격변을 가져왔습니다.
- 러시아의 혁명과 새로운 체제:
러시아는 연합군의 일원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지만, 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막대한 인명 피해와 경제난, 그리고 차르 체제의 무능함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으로 내부 혼란이 극에 달했습니다. 이때,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혁명 세력은 '평화'를 핵심 구호로 내세우며 전쟁 즉각 중단을 요구했지요. 결국 1917년, 러시아 제국은 2월 혁명으로 붕괴하고 임시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임시 정부가 전쟁을 계속하려 하자, 볼셰비키가 10월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습니다. 혁명에 성공한 볼셰비키는 약속대로 독일과의 강화 조약을 체결하여 1차 세계대전에서 즉각 철수했습니다. 이후 러시아는 볼셰비키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백군)과의 처절한 내전에 돌입했고, 레프 트로츠키는 이 러시아 내전에서 볼셰비키군(적군)의 총사령관으로서 군대를 이끌며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이로써 러시아는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됩니다.
- 독일 제국의 자멸과 공화국의 탄생:
독일 또한 서부 전선의 장기화와 해상 봉쇄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전쟁 막바지에는 해군 기지에서 병사들이 명령을 거부하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고, 이 불씨는 순식간에 독일 전역으로 번져 혁명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결국 빌헬름 2세 황제가 퇴위하고 망명하면서 제국은 스스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독일은 바이마르 공화국이라는 새로운 민주주의 정부로 재탄생하며 전쟁의 종식을 알렸습니다.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
전쟁의 직접적인 발단이 되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다민족 제국이라는 태생적 한계와 전쟁 패배의 압력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내부의 수많은 민족들이 독립을 요구하며 제국은 빠르게 와해되었고, 합스부르크 왕조는 종말을 고했습니다.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헝가리는 물론 체코, 슬로바키아 등 여러 신생 국가들이 이 거대한 제국의 잔해 위에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왕권을 강화하고 제국을 확장하려 했던 전쟁의 결과는 이처럼 역설적이었습니다. 막대한 피를 흘리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더 이상은 안 된다'고 깨달았고,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라는 새로운 정치 체제가 그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국제 평화를 위한 기구인 국제연맹도 이때 처음 등장했습니다. 당시 승전국이었던 영국, 프랑스 등은 식민지 제국을 거의 그대로 유지했으나, 패전국이었던 왕정들은 제국이 붕괴하는 역설을 맞이했던 것이지요.
2. 2차 세계대전: 식민지를 탐했지만, 승전국마저 식민지를 잃어버린 역설
1차 세계대전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 채 30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 세계는 또다시 전쟁의 포화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1929년에 시작된 세계 대공황은 전 세계를 경제난의 나락으로 밀어 넣었고, 저는 여기서 2차 세계대전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을 봅니다. 자원이 부족하고 식민지가 적었던 독일, 일본, 이탈리아는 대공황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식민지 확보에 나섰습니다. 그들은 '전쟁'이라는 가장 폭력적인 수단으로 자원과 시장을 얻으려 했고, 파시즘과 군국주의라는 극단적인 이념을 앞세워 무력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은 유럽을, 일본은 아시아를, 이탈리아는 지중해를 장악하겠다는 야욕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의 침략은 결국 1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넘어선 끔찍한 인류 최악의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수천만 명의 목숨이 사라지고 전 세계가 폐허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결과는 전쟁을 일으킨 자들의 목표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저는 역사 속에서 또 하나의 역설을 발견합니다. 식민지 확보를 위해 시작된 이 전쟁은 오히려 전 세계적인 탈식민화를 가속화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입니다. 1차 대전 승전국들은 식민지를 유지했지만, 2차 대전 이후에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승전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조차도 막대한 전쟁 비용과 국력 소모로 인해 식민지를 유지할 힘을 잃었으며, 국제 사회의 흐름 또한 민족자결주의와 탈식민주의로 전환되었습니다. 결국 이들 강대국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수많은 식민지 국가들을 독립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국력은 쇠퇴했고, 인류는 파시즘과 군국주의, 그리고 제국주의가 초래한 비극을 통해 다시 한번 새로운 평화 질서(유엔 설립 등)를 구축하려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이 역시도 엄청난 희생 위에서 얻어낸 '진보'였습니다.
3. 고통 속에서만 진보하는 인류의 운명? 그리고 현재 우리의 모습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을 보면서 저는 계속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엄청난 시련과 고통이 동반되어야만 인류는 어쩔 수 없이 발전하는 걸까요?" "왜 우리는 논리적으로 옳은 방향을 계몽해서 찾아가는 게 아니라, 파멸 직전까지 가야만 깨닫는 걸까요?"
아마도 그 이유는 인간 자체가 그렇게 세팅된 것 같아서입니다. 저는 '구석기 이후 생물학적으로 인간이 진화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본능, 욕망, 경쟁심은 수만 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전쟁이라는 것도 인간 본연의 폭력성과 욕망이 특정 조건, 예를 들면 경제적 위기나 자원 부족, 이데올로기 대립 같은 것과 결합했을 때 터져 나오는 것에 불과한 건 아닐까요. 평화와 안정 속에서는 좀처럼 변하려 하지 않다가,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야 비로소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그런 역설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세계를 보면서 저는 불길한 생각이 들곤 합니다. "1차 대전으로 그 난리를 치고 30년 지나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잖아! 조건만 되면 터진다는 거지! 아직 안 터지는 건 아직 조건이 안 된 거고!" 지금 우리가 마주한 경제적 불평등, 강대국들의 패권 경쟁, 민족주의의 재부상 같은 모습들은 과거 전쟁 전야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지 않을까요?
다행히 아직까지 대규모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유발 하라리의 말처럼 핵무기가 역설적으로 대규모 전쟁을 억제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핵무기의 압도적인 파괴력이라는 비극적인 논리 때문에, 그 누구도 전면적인 전쟁을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강력한 무기가 오히려 대규모 전쟁을 막는 역설.
결국 저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가장 강력한 무기가 대규모 전쟁을 억제하고, 전쟁을 통해서 인류는 진보하고!" 이 두 문장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존재의 비극적인 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이 아닐까 합니다. 인류는 끝없이 서로를 위협하면서, 그 위협 덕분에 파멸 직전의 상황만은 막고, 또 엄청난 고통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한 발짝 진보하는... 그런 역설적인 운명에 '세팅된' 존재들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