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진실
우리는 역사와 국제 관계를 이야기할 때 종종 '선의'와 '악의'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에 갇히곤 합니다. 하지만 국제질서는 감상적인 '도덕'보다는 "냉혹한 '힘의 논리'와 각국의 '이기적인 계산'에 따라 작동해 왔다는 진실"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특별하게 생각했던 많은 역사적 사건들도 그 본질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나폴레옹과 헤겔, 그리고 '불편한' 이해
독일 철학자 헤겔이 프랑스의 정복자 나폴레옹을 '말을 탄 절대정신'이라고 찬양했던 일은 나에게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왔었습니다. 나폴레옹이 혁명 정신과는 거리가 멀게 스스로 황제가 되고, 타국을 침략해 알제리나 베트남 같은 곳을 식민지로 삼는 프랑스 제국주의의 토대를 닦았다는 점에서 이는 모순적으로 보이죠. 하지만 헤겔은 당시 스스로 개혁하지 못하던 봉건적 독일 사회에 나폴레옹이 가져온 강제적 근대화의 충격파를 '시대의 진보'로 해석한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만약 개회기에 조선의 철학자가 침략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절대정신'이라고 칭했다면 역사의 죄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상상도 해볼 수 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메이지 유신의 혁명가로서 조선의 근대화를 이야기했던 점, 그리고 당시 조선 사회가 자생적 근대화를 이루기 어려웠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우리나라였으면 이완용보다 매국노 취급을 당했을 것 같네요!
그러나 헤겔은 독일철학사에서는 물론 세계 철학사에서도 빠질 수 없는 인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ㆍ 이러면에서 독일인들의 자신감이 느껴집니다.
2. 식민 지배, 본질은 모두 같다
일본의 조선 지배를 특별히 '악랄하다'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시대의 강대국 중 식민지를 갖지 않은 나라는 거의 없었습니다. 영국, 프랑스는 물론 벨기에나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 대부분의 서구 열강들은 식민지를 통해 자원을 수탈하고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오히려 영국이나 프랑스의 식민 지배는 일본보다 더 긴 기간 동안, 더 광범위하게, 더 잔혹하게 이루어진 측면도 많습니다. 수천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로 끌려가고, 대기근으로 인해 수백만 명의 인도인들이 아사했으며, 서구의 인종주의는 '열등한 민족을 계몽한다'는 명분으로 인간 자체를 유린했습니다. 이러한 절대적인 피해 규모와 잔혹함의 측면에서 보면,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 지배가 결코 일본보다 덜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의 아픔과 고통을 축소 하자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ㆍ
3. '의도'와 '선의', 그리고 현실의 벽: 역사적 인물 평가의 복잡성
역사적 인물의 행동을 '선의'나 '의도'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와 '논조'만 본다면, 때로는 극과 극에 있는 인물들도 유사해 보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인도의 독립운동가 간디입니다. 간디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에 협력하며 인도인의 영국군 참전을 독려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영국이 전쟁 후 인도의 자치권을 부여할 것이라는 기대에 기반한 전략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의 입장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오히려 영국에 맞서 '인도를 떠나라(Quit India)'는 비폭력 비협력 운동을 주도하며 영국의 전쟁 노력에 대한 협력을 반대했습니다. 간디의 이러한 비폭력 저항 방식은 영미권의 사상(예: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민 불복종, 톨스토이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았고, 서구 사회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투쟁 방식이었기에 서구 세계에서 '비폭력'의 상징으로 크게 추앙받게 되었습니다.
이와 달리 인도 내부의 민족주의자들 중 일부는 간디의 온건한 노선을 비판하고 "수바스 찬드라 보스(Subhas Chandra Bose)"와 같은 인물을 오히려 더 높이 평가하기도 합니다.
"수바스 찬드라 보스(Subhas Chandra Bose)"는 인도의 급진적 독립운동가로, 간디의 비폭력 노선이 너무 온건하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적의 적은 친구"라는 논리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인도의 주적 영국에 맞서기 위해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과 손을 잡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직접 독일로 망명하고, 이후 일본의 지원을 받아 "인도 국민군"을 조직하여 실제로 영국군과 싸웠습니다. 인도 내 강경 민족주의자들에게 보스는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진정한 저항의 상징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이는 간디가 주로 유럽이나 미국 등 서구 사회에서 비폭력 평화주의자로 '띄워진' 측면이 강하며, 서구 중심적 역사관을 통해 역사를 배우는 우리에게는 보스의 존재 자체가 생소할 수 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보스 스피커는 찬드라 보스와 성이 같은 벵갈출신인도계이지요! 간접적으로 연관성이 있습니다ㆍ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무엇을 말해줄까요? 간디의 행동이나 보스의 '적과의 동침', 그리고 일제강점기 초, 일부 조선의 지식인들이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서 '자치권'이나 '근대화'를 꿈꾸며 일본에 협력하려 했던 논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각자의 행동들은 표면적으로 "주어진 상황에서 강대국의 힘을 역이용하거나 활용하여 자국의 실리를 추구하려는 전략적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유사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독립을 위해 지배국의 군대에 참여해야 한다'거나, '강한 외부 세력의 힘을 빌려 현 체제에 균열을 내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생존과 대의를 위한 "최대한의 '현실적 계산'"이었을 수 있습니다. 이때, 누가 승전국이 될지, 혹은 어떤 이념이 시대를 지배할지는 아무도 몰랐을 테니까요. 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이 승전국이 아니었다면, 간디의 평가 역시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라는 냉혹한 가정도 가능합니다. 일본군에 참여한 조선인의 위상도 마찬가지였겠지요.
심지어 레닌, 마오쩌둥, 김일성 같은 사회주의 지도자들조차도 처음에는 빈부격차 없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선의'와 '이상'을 가지고 혁명에 뛰어들었을지 모르나, 그 결과는 참혹한 독재와 대규모 인명 살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아무리 숭고한 '의도'라 할지라도, 그 '결과'가 결코 '선'이 아닐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4. 과거사 문제: 배상의 현실과 힘의 논리
결국 국제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선악'이라는 관념이 아니라, "냉혹한 '힘의 논리'와 '승패'라는 결과"에 크게 좌우됩니다. 승자의 기록이 역사가 되고, 패자는 단죄받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간디"와 "친일파"를 구분하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 우위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승패가 그 행위에 부여하는 의미가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는 사례인 것입니다.
일본이 한국에 배상했다고 알려진 '청구권 자금'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통해 지급된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총 5억 달러였습니다. 현재 가치로 약 "6,700억 원"에 달하는 이 금액은 당시 대한민국 1년 총수출액의 2년 치, 1년 국가 예산의 약 80%에 해당하는 막대한 규모였습니다. 이 돈은 포항제철 등 한국의 경제 개발에 중요한 동력이 되었죠. 명목이 어찌 되었든 당시 한국 경제 규모를 고려할 때 이는 "엄청나게 많은 금액"이었습니다.
다른 식민 지배국들의 배상 사례와 비교해 보면 이러한 규모는 더욱 두드러집니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 중 자국 군대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법원의 판결로 특정 개인들에게 20만 유로(약 3.2억 원) 정도를 배상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국가 대 국가의 포괄적 배상'이라기보다는 '특정 사건에 대한 개인적 보상' 성격이 강합니다. 네덜란드의 배상 사례에 비하면 일본의 지급액은 비교도 안 될 만큼 큰 규모였습니다.
식민지배를 사과는 해도 국가 간 배상이나 보상을 했다는 소리는 들어보질 못 했습니다ㆍ
이러한 배경을 볼 때, 국제적인 시각에서 일본은 자신들이 과거 식민 지배에 대해 "할 만큼 했다"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일본은 한일기본조약 등 국제법적 조약을 통해 국가 간 청구권 문제를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해결'했다고 주장합니다.
둘째, 다른 서구 열강들이 식민 지배에 대해 이렇게 큰 금액을 국가 차원에서 지급한 선례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일본은 상대적으로 많은 경제적 지원을 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셋째, 한국에 대한 '배상'이 인정될 경우, 북한, 중국, 대만, 동남아시아 등 피해국들의 연쇄적인 배상 요구가 터져 나올 것을 우려하는 '판도라의 상자' 부담도 일본이 현재의 태도를 고수하는 강력한 이유입니다. 그 비용은 일본 경제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대할 것입니다. 그냥 쉽게 사과하고 배상하면 끝날 문제가 아니기에 더욱 복잡한 것이죠.
이건 식민지를 거느렸던 강대국들도 일본이 선례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ㆍ 그런 의미에게 강대국은 우리의 배상요구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너무 당연해 보입니다. 국제질서는 냉정합니다.
5. 현실을 직시한 미래 지향적 관계 설정: '새로운 위상'에서
이처럼 국제 관계는 '선악'이 아닌 '힘'과 '이익'의 논리가 지배하며, 각국은 자국의 실리를 위해 움직입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일본은 과거사 문제를 국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측면이 있고, 우리나라도 민족 감정을 통해 국내 정치를 이용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과거 어려운 시절의 대한민국이 아닙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저력을 보여주며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도 세계의 인정을 받는 "당당한 선진국"에 당당히 섰습니다. 중국이나 대만도 일본과의 막대한 과거 피해에도 불구하고 국익을 위해 국가적 배상 청구를 포기했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피해 의식에서 벗어나 당당한 우리의 위상에 걸맞게 행동해야 할 때"입니다. "일본에 언제까지 과거사 문제의 책임을 묻고만 있을 것이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합니다. 진정한 극복은 우리가 "더욱 발전하고 확고한 국제적 위상"을 다져, 과거의 그늘을 벗어나 우리의 주도적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본은 알아서 사과합니다. 일본이 미국에 살살 기는 거 보세요!
지금은 미중 패권 경쟁, 일본의 우경화, 중국의 패권주의 등 복잡한 정세가 동북아를 감싸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단순히 '실리외교'를 넘어, 동북아시아의 리더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민주주의나 문화, 경제력 모두 이제는 충분히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독재국가인 중국과 달리 민주주의의 저력을 가진 우리가, 이 복잡한 동북아 정세 속에서 평화와 번영을 이끄는 새로운 질서를 제시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선진국으로서의 책임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전 세계가 보호무역으로 문을 닫고, 난민 때문에 난처해하고 있으며, 경제침체로 전쟁으로 스토롱맨들이 지도자로 부상해 있습니다ㆍ
중심을 잡기 어려운 시기입니다ㆍ
과연 대한민국은 어디로 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