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학번이 건너온 청춘의 기록
넷플릭스 상위권에 떠 있는 드라마 <은중과 상연>을 처음 틀었을 때, 나는 첫 에피소드도 다 보지 못했다. 가난하지만 밝은 아이와 부잣집의 이기적인 아이라는 설정이 '뻔한 스토리'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어쩌면 <응답하라 1988>의 덕선이 같은 전형적인 주인공의 성공담이겠거니 싶어 흥미를 잃었던 것 같다.
그렇게 잊힐 뻔한 이 드라마를 다시 보게 된 건, 안락사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한 후배의 추천 때문이었다. "선배, 이 드라마 끝까지 보세요." 그 한마디에 이끌려 다시 마주한 화면 속에는,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우리 세대의 초상과 후배세대들에 대한 부러움이 숨어 있었다.
1. 상연, 인정받지 못한 우등생의 쓸쓸함
다시 드라마를 보며 문득 깨달았다. 세상은 보통 주인공 은중에게 감정을 이입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조연인 상연에게 마음이 쓰였다. "상연 같은 친구는 손절이 답"이라는 냉정한 댓글들을 보며, 오히려 아귀가 맞지 않는 상연의 어긋난 모습이 꼭 나 같아 짠해졌다. 보통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는 게 자연스러운데, 나는 꼭 조연에게, 그것도 어딘가 아귀가 안 맞는, 뭔가 '어글어질수록' 나 같아서 더 짠해진다. '낡은 세대'라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이런 내가 때로는 싫다가도, 한편으로는 짠하기도 하고 그렇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이선균이 연기한 '동훈'은 친구에게도, 동료에게도, 형제에게도, 부모님에게도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 이지아의 입장에서 그는 매일 업무와 친구들, 형제들과의 술자리에 매여 살고, 주말에는 조기 축구에 진심인 남편일 뿐이었다. 나는 은연중에 동훈 아내 이지아에게 감정 이입을 하는 나쁜 습관(?)이 있는 것 같다. 인간은 보는 관점에 따라 입체적이고, 인간관계는 참으로 복잡하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그래서 그런지, 다시 본 드라마에서 상연의 이야기에 깊이 감정이입될 때마다 나는 마음이 짠했다. 나름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노력했지만, 성과는 늘 엄마의 기대에 못 미쳤던 지난날의 내가 떠올라서였다. 상연은 공부도 잘했다. 잘했는데도 엄마에게 칭찬 한마디 듣지 못하고, 심지어 엄마나 친오빠, 그리고 친구들까지 자기보다 은중이를 더 챙기는 것 같을 때, 어린 상연의 마음은 얼마나 외롭고 서러웠을까? 나야 못해서 그랬다지만, 상연은 '잘했는데도' 인정받지 못해 마음이 더 아팠으리라.
상연이 상학 선배를 너무 좋아했지만, 그 마음이 끝내 이루어질 수 없었고 알아주지 않을 때의 그 쓸쓸함은 또 어땠을까. 문득 나의 젊은 시절 첫 연애가 떠올랐다. 그때의 나의 첫 연애는 꾸밈없어 풋풋 했지만 처음이라서 서툴고, 알지 못해 어수룩했고, 너무 좋아서 잘 보이기 위해 늘 긴장했었던듯하다. 그리고 그 시대가 그리 밝지는 않아서 그랬던 건 아닐까 하는 핑계로 위안을 삼아 본다.
2. 90학번, 타다 남은 잿더미를 뒤적거리던 세대
나는 90학번이다. 80년대 뜨겁게 타오르던 이념이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사그라들던 시기였다. 91년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92년 대선을 기점으로 정권 교체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던 시절. 80년대처럼 열정적이지도, 그렇다고 쿨하지도 못했던 참 어정쩡한 시기였다.
군대 제대 후 복학하니 94학번 후배들은 자신들을 'X세대', '신세대'라고 불렀지만, 나는 그들의 에너지를 온전히 따라갈 수도, 그렇다고 80년대 이념을 붙잡고 있기도 어려웠다. 그 이념들마저 빛바랜 사진처럼 낡아 보였다. 그렇게 김광석의 노래가 묵직하게 가라앉은 공기를 달랬고,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 가사처럼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복잡하기만 했다. 신경숙 작가의 『깊은 슬픔』이나 『외딴방』을 읽으며 타다 남은 잿더미를 뒤적거리듯 혼자? 쓸쓸했던 시절이었다.
김광석의 목소리가 허공을 맴돌던 그 콘서트. 그녀와 함께 들었던 '서른 즈음에'. 그 가사들이 마치 미래에서 온 예언처럼 들렸던가?
'내가 떠나보낸 적도 없는데, 내가 떠나온 적도 없는데.'
그 아련한 음률 속에서, 시간은 내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미 낯선 이별의 풍경을 그려나가고 있었다. 어떤 관계는, 세상의 실타래처럼 엉켜 있다가, 문득 풀어지거나 혹은 영영 끊어져버리는 순간이 있다. 나는 그저 그 길목에 서 있었을 뿐이었다. 처음 하는 연애라서 그랬는지, 서툴러서 그랬는지, 아니면 시대가 그랬는지 바보같이 사랑이란 게 원래 그렇게 하는 걸 줄 알았다.
상연이 2002년 월드컵 때 벽에 기대고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을 보며, 나도 온 국민이 거리에서 열광할 때 그저 집에서 우두커니 TV로 시간을 보냈거나, 다음 날 하이라이트만 찾아봤던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
3. 은중, 군중 속의 고독을 꾸역꾸역 견뎌낸 시간
은중에게 감정이입 될 때는 또 다른 마음이 일었다. 모든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 같지만, 세월이 지나면 주변 친구들도 각자의 길로 가고, 친구 상연과는 잘 안 되고, 상학 선배와도 이어지지 못해 결국 혼자가 된다는 사실. 은중이 모두 떠나고 상학 선배와도 이별한 뒤 쓸쓸히 학교를 등질 때의 모습은 내 젊은 날을 스쳐 지나갔다.
나 역시 군대 제대 후 이리저리 부딪히고 좌충우돌하며 모든 것이 '실패'했다고 느낄 무렵이 있었다. 자취방에 혼자 틀어박혀 끙끙거리며 먹고살기 위해 대학 4학년이 되어서야 전공도 아닌 공부를 할 때였다. 아무도 찾지 않고 아무도 오지 않는 자취방에서 꾸역꾸역 전공도 아닌 공부를 이해도 되지 않는 책을 통째로 외우며 버텼다. 은중이도 주변에 친구도 많고 상학 선배도 있었지만, 결국 혼자서 무언가를 꾸역꾸역 해냈을 것이다. 나 역시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지만 늘 혼자 같은 기분이었다. 은중도 그랬을 것이다. 군중 속의 고독이 진짜 고독이지, 암!
은중과 상연의 대학 생활은 2000년대 초반,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처음으로 98년에 정권이 교체되고 인터넷과 핸드폰이 보급되면서 뭔가 다시 꿈틀대던 시절이었다. 불과 10년 차이인데도, 은중이 상학 선배랑 알콩달콩 꽁냥꽁냥, 동아리 동료들의 박수를 받으며 쑥스러운 연애를 하는 모습을 보며 어찌나 부럽던지. 은중과 상학 선배의 초반 연애 시절을 보며, 나에게는 2000년대 학번후배들에게 부러움을 넘어선 질투(?)마저 느끼게 했다. '아, 너네들은 정말 좋았겠구나! 부럽다!'
4. 그럼에도 기특한 우리의 청춘에게
현실에서는 공부 잘하고 잘 사는 애들이 성격도 좋고 인기도 많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때로는 그 반대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어쩌면 드라마는 현실의 대리 만족을 반영하는 것 아닐까? 우리가 바라는 모습, 작가가 투영한 우리 모두의 희망이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내 마음속에는 은중과 상연이 함께 공존하는 듯하다. 한편으론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지만, 다른 한편으론 혼자서 꿋꿋하게 버텨내는 나약하고도 강인한 자아들.
90학번으로 90년대를 대학에서 보냈다. 어설프고, 어색하고, 좌충우돌 심난하며 못난이 짓도 많이 했지만, 그때 그 시절을 나와 함께했던 사람들 모두 나름 노력했고, 그립게 생각한다.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감정, 쓰라린 상처, 그리고 소심하고 찌질했던 나 자신 모두가 지금의 나를 성장시킨 소중한 자양분이 되었다. 지금은 다들 각자의 길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지만, 나름 뜨거웠던 그때는 그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다 한 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20대 초반에 세상에 대해, 나 자신에 대해 뭘 그렇게 알았겠는가? 그럼에도 무사히, 기특하게 지금까지 살아온 나 자신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만약 내가 상연처럼 삶의 마지막을 선택해야 하는 길목에 서게 된다면… 나는 누구에게 그 여정을 함께해 달라고 부탁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사람은 기꺼이 나의 손을 잡아줄까? 상연의 마지막이 비단 죽음만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온전히 이해받고 싶어 했던 간절함처럼 느껴져 마음이 저릿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