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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파업: 혼란 속에서 피어난 리더십.-2-

by 자유로운영혼

420 합의가 두 달 뒤인 6월 초, 민주당 이호웅 국회의원 발의로 철도산업발전기본법안이 국회에 상정됩니다. 4월 20일 합의 당시 철도공사화는 노사가 합의하여 공론화 과정을 거친 후 진행하기로 했었지만, 갑자기 의원 발의로 법안이 상정된 것입니다. 철도노조는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입법이라며 즉각 반대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전상운 본부장님이 서울로 떠나기 전 저를 불러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고, 저는 노무현 정권에 대한 지지가 가장 크게 작용하여 파업에는 반대한다는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드렸습니다.

서울 본조에서는 파업을 하기로 결정되었고, D-데이는 6월 28일로 정해졌습니다. 대전 지역은 조치원에 있는 고려대학교에서 파업 전야제를 열기로 했습니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조합원들은 학생회관으로 집결했습니다. 밤새 시시각각 서울 중앙에서 지침이 내려왔고, 조합원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거나 전화를 하며 각자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새벽 4시쯤 박태엽 부본부장이 저를 부르더니 전상운 본부장님을 모시고 고대 밖으로 나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새벽에 경찰이 고려대에 진입한다는 정보가 있었죠. 조합원들이 모여 파업 선언을 하는 지도부를 뒤로하고, 전상운본부장님은 당황해하셨습니다. 중앙의 긴급 지침이라고 거듭 설득 과정을 거쳐 고려대 학생의 도움으로 뒷산을 넘어 고대 밖으로 나올 수 있었고, 곧장 대전 지역 민주노총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침이 되니 고대를 빠져나온 간부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고, 일부 조합원들도 민주노총으로 모였습니다. 그렇게 파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민주노총에 경찰이 진입한다는 소식에 조합원들은 민주노총 밖으로 흩어졌고, 지방본부 간부만 민주노총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조합원의 사기를 위해 민주노총으로의 집결과 산개가 번갈아 이루어졌습니다. 민주노총에서 지낸 지 3일쯤 새벽, 위원장님이 저를 불렀습니다. 내일 아침, 별도의 합의문 없이 파업 철회를 중앙 지도부에서 기자회견을 할 것이라고요. 며칠 더 갈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이었습니다. 잠시 후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조합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복귀는 민주노총에 집결한 후 조합원 총회를 통해 조직적으로 복귀한다는 방침이었으나, 이미 중앙에서 파업 철회를 결정하자 지쳐있는 조합원들은 빨리 복귀하고 싶어 했습니다.


리더의 무게: 비난을 감내하며 성장하다

저는 전상운 본부장님께 민주노총으로 집결하기보다 회사 내 문화회관을 빌려 조합원 총회를 하는 것이 파업대오에 아직 참여하고 있는 조합원들의 개별 행동을 막고 혼란을 줄일 수 있을 것 같다고 조언했습니다. 본부장님은 중앙 지침에 맞춰 복귀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고민했고, 저는 본부장님을 재차 설득하여 승낙을 받고 사측에 의사를 타진했습니다. 조합원 총회를 열 수 있도록 문화회관을 개방해 달라, 그럼 지금 복귀를 검토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측도 이미 파업 철회 결정을 알고 있었던 터라 불허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허탈했죠.

사측 실무자인 노정팀장과 옥신각신하며 설득 과정을 거쳐 간신히 문화회관 개방을 얻어냈습니다. 본부장님께 보고하고 곧바로 조합원들에게 문자 메시지로 지침을 내려 오전 9시까지 문화회관으로 집결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조합원들이 문화회관에 모여 조합원 총회를 열었습니다. 그간의 경과를 보고하고 질의응답 시간이 되었는데, 사측과의 이면 합의가 있었는지가 주요 쟁점이었으나 이면 합의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원래 중앙 지침은 민주노총 집결 후 총회를 거쳐 복귀하는 것인데, 왜 복귀 후 총회를 하느냐는 절차 문제로 지밤본부집행부가 비판의 도마에 올랐습니다. 전상운 본부장님은 내부 사정을 고려해 결정했다고 했지만, 조합원들의 비판은 더욱 거세고 날카로워졌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저는 정말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본부장님은 제가 받아야 할 비난을 온몸으로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견디셨습니다. 20분 정도였을 것 같은데 저에게는 2시간쯤의 시간이 흐르는 듯했습니다.

그때 전상운 본부장님은 중앙의 지침을 지키지 않고 미리 복귀하여 이곳에서 총회를 치르는 것에 대해 조합원들이 비판하고 몰아붙이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핑계도 대지 않고 그것을 다 견뎌내며 흥분한 조합원들과 대화하며 차분히 대응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저는 본부장님을 제가 설득했다고, 제 판단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몇 번 온건한 주장을 하다가 강경한 조합원들에게 엄청난 비판을 받아왔고, 입사한 지 3년 정도밖에 안 된 젊은 국장인 제가 나섰다면 저는 산산조각 날 것 같아서 도저히 제 책임이라고 나설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건 핑계일지도 모르고, 본능적으로 겁이 났던 것 같습니다.

본부장님은 본조의 지침을 변경한 잘못은 잘못대로 시인하면서도, 그 과정을 지켜보는 저는 '저 버텨내는 모습은 어떤 학습이나 책을 읽어서 지혜를 쌓아서 된다기보다는 애초에 사람이 가진 그릇의 크기라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는구나' 하고 처음 느꼈습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크기가 있다는 것을요. 본부장님이 고졸이라는 학력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며 학생운동을 하고 공장으로 위장취업한 학생운동 출신이 즐비한 이곳에서 인정받아 가며 지부장을 거쳐 본부장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를 그때 깨달았습니다. 제가 아무리 책을 읽고 품성을 쌓는다고 해도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헌신과 유대: 이어진 관계의 기록

당시 전상운 본부장님은 수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경찰과 협의하여 파업이 마무리되는 대로 경찰에 출두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굉장히 힘든 과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고 꼿꼿하게 마무리까지 다 하고 경찰에 출두했습니다. 전상운 본부장님 형수님 또한 그것을 잘 견뎌내는 모습을 보면서 역시 배움이라는 것, 어떤 책을 읽는다는 것이 인간에게 조금은 플러스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근본적으로 그 사람의 크기나 스타일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스스로에게 대단히 겸손해지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런 분을 옆에서 지켜보고 함께 했었던 것들이 너무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웠습니다. 제가 그릇이 작아서 엇나갈 수 있고 비뚤어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상운 본부장 같은 분이 옆에 있고 그런 분을 바라보며 함께 했기 때문에 지금 크게 엇나가지 않고 그나마 이 자리에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후 저는 입사 3년 만에 직위해제 2개월과 감봉 2개월이라는 첫 징계를 받았습니다. 전상운 본부장님은 3달가량의 감옥 생활과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2년, 그리고 15년간 해고 생활을 하고 정년퇴직 1개월 남기고 복직하셨습니다. 전상운 본부장님이 경찰서구치소에 있을 때 형수님 좀 챙겨달라는 당부가 있어 그때부터 시작된 가족 모임은 20여 년이 지나서 본부장님 정년퇴직 후에도 그때 그 시절 간부들과 두어 달에 한 번씩 만나 수다를 떨며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형수님 말로는 남편이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때는 엄청 미안해했나 보라고 하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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