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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을 넘어선 성장 -3-

2006년 3월 파업, 그리고 소중한 인연들

by 자유로운영혼


징계와 심적 고통, 그리고 새로운 시작

2년 동안 지방 본부 간부 활동을 마치고 현장으로 돌아왔을 때, 저는 솔직히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했습니다. 노무현 정부를 지지하면서도 징계의 어려움과 노조 간부들의 고통을 동시에 겪어야 했기에, 멘탈이 약한 저에게는 정말이지 쉽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징계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물론, 조합원들이 노무현 정부에 대해 반감을 표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심적인 고통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임기 후 현장으로 복귀한 저는 조용히 지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연결조로 배치받아 처음으로 용접과 산소 작업을 배우며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재미를 느꼈고, 무엇보다 좋았던 건 현장에서 만난 후배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들과의 교류는 저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힘든 시기를 이겨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소중한 인연들: 성연, 수천과의 만남

현장에서 만난 후배들 중 성연이와 수천이는 지금까지도 저에게 '찐친'으로 남아있습니다. 특히 수천이는 당시 계약직이었는데, 정말이지 꽃미남이었죠! 저보다 딱 열 살 어린 스물네 살이었습니다. 우리는 고된 현장 일을 마치고 퇴근할 무렵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회사 앞에서 만나 삼겹살에 소주 한잔 기울이곤 했습니다. 선배들 흉도 좀 보고 회사 욕도 하면서 하루의 피로를 풀었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성연이는 조합원들의 마음을 잘 읽는 능력이 탁월했고, 수천이는 뛰어난 습득 능력으로 저를 감탄시켰습니다.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저는 인간관계의 폭을 넓힐 수 있었고, 지부 활동에도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의리로 함께한 파업과 깊어진 유대감

그러다 2006년 3월 1일 철도에서는 파업이 벌어졌고, 수천이도 함께하게 됐습니다. 파업하고 이틀째 되던 날 수천이는 계약직이었기에, 저희는 수천이가 불이익을 받을까 봐 걱정되는 마음에 파업에서 빠지라고 권했습니다. 그런데 수천이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형, 나는 왜 파업을 하는지, 노동조합 이런 거 잘 알지도 못해요. 그래도 나는 형이랑 성연이 형을 믿어서 의리로 여기 있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나만 복귀하라는 건 형들이 나에 대한 신뢰를 깨는 거예요. 서운해요."

이 말을 듣는데 정말 의외였습니다. 저희는 계약직인 수천이를 배려해서 한 말이었는데, 오히려 서운함을 느꼈다니요. 그 말을 듣고 저와 성연이는 바로 마음을 바꿨습니다. 그래, 끝까지 함께 가자!

그래도 일단 집에 가서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다시 모이기로 했습니다.

우리 셋은 모두 회사 앞 사택에 살았습니다. 수천이는 그때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신혼이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제수씨가 말릴 줄 알았습니다. 보통 기세등등하던 선배들도 집에 한번 다녀오면 형수님 때문에 안 되겠다며 꼬리를 내리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두 시간쯤 후에 사택 입구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가, 제가 먼저 나오고 성연이가 나오고 조금 있으니 수천이가 도시락을 들고 나타난 겁니다. 제수씨가 힘내라고 과일을 잔뜩 사줬다면서 말이지요. 헐! 스물네 살 수천이와 스물한 살 제수씨의 그 무모함(?)에 저와 성연이는 정말 존경심을 표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무사히? 파업을 마치고 현장에 복귀했습니다.

저는 지부 간부였던 터라 바로 직위해제되어 현장과 격리되었고, 그때 수천이가 정말 걱정됐습니다. 노조 쪽에 파업에 끝까지 참여한 수천이의 고용 승계에 대해 거듭거듭 부탁했습니다. 다행히 두 달쯤 지나 저도 직위해제가 풀려 현장에 복귀했고, 수천이도 별 탈 없이 연말에 고용 승계가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다 지난 일이지만, 그때는 정말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습니다.


천정기중기자격증을 따다!

파업이 지나고 현장 생활을 하던 중에 천정기중기 기능사 자격증 실기 시험을 우리 회사 기중기로 우리 회사에서 본다는 공문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거다 싶었죠! 저는 성연이랑 수천이를 불러서 같이 응시하자고 했습니다. 수천이는 제가 하자고 하니 마지못해 응시하게 됐지요. 시험 보기 하루 전 토요일, 회사로 집합해서 같이 공부했습니다. 수천이는 진짜 공부하기 싫어했는데, 전화해서 억지로 나오게 만들었고, 서로 문제를 내고 답하는 걸 반복하며 외웠습니다. 기능사 시험도 공부 안 하면 떨어지거든요! 그렇게 성연이랑 저는 공부하기 싫어하는 수천이를 반강제로 앉혀놓고 문제-답, 문제-답을 계속 외우게 했습니다.

결과는? 우리 셋 다 필기 합격! 그런데 실기 시험을 대전이 아니라 서울 정비창에서 본다는 겁니다. 헐! 그래서 정비창에서 10여 명이 서울로 시험을 보러 갔지요. 그런데 여기서 이변이 발생했습니다. 모두 떨어지고 수천이 혼자만 실기에 합격한 겁니다! 심지어 현장에서 천정기중기를 매일 운전하는 선배도 떨어졌는데 말이지요. 수천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냥 게임하는 것 같았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때 수천이가 뭔가 비범하고 강심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수천이는 철도공사 정규직 시험에 합격하고 승급도 해서 지금은 부서는 다르지만 저와 같이 철도공사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녀석은 정규직이 될 때도, 승진했을 때도 꼭 저와 성연이를 불러서 저녁을 함께 먹자고 합니다. 그때 그 시절 형들이랑 뒹굴던 때가 좋았다면서 말이지요. 사실 철도에 별로 정이 들지 않았었는데 형들 덕에 정 붙이고 아직 다니게 되었다고 하면서요!

저는 수천이가 해고당할 수도 있는데 파업 같이 가자고 꼬신 것밖에 없는데 말이에요!ㅋㅋ


성연이는 믿음직한 조언자

저는 소심하고 왜소했던 반면, 성연이는 밝고 씩씩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지부활동을 같이 할 때는 제가 지부 밴드에 글을 올리거나 무슨 일을 할 때면 성연이에게 꼭 물어봅니다. 조합원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말입니다. 성연이는 조합원틀과의 소통 감각이 정말 탁월해서, 제가 과민하게 반응하거나 조합원들과 동떨어진 생각을 하고 있으면 과감하게 "형, 이런 건 잘 안 먹힐 것 같아요" 하고 조언해 줍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보면 역시 성연이의 감각이 거의 정확했지요. 여전히 현장에서 인기도 많고 폭넓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어서 그런지, 제가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는 성연이가 옆에 있어 정말 든든합니다.


그때 그 시절 그대들이 있어 즐거웠다

그때 그 시절, 힘든 시간 속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 덕분에 지금까지 잘 버티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연이와 수천이, 이 친구들이 있어서 저의 30대 청춘? 이 외롭지만은 않았습니다.

대둔산나들이 : 병관형, 성연,수천, 진용,주원

26살 언제나 청춘 수천!

언제나 든든한 성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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