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정리2

가벼움의 대가

by 오이오


최근에는 여성병원에 가서 관련 진단을 받았다.

진단 결과는 상당히 불리했고, 그동안 겪었던 일들이 떠오르며 세상이 내 여성성을 시험하는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두렵고 슬펐는지 그동안 잠재워왔던 불만들을 속으로 터뜨렸다.


나는 온전히 여자로서 살아보지 못했는데, 왜 갑자기 이제는 여자로 살아야하는걸까?

나는 지금까지 보호받는 여자도 아니었고, 선택받는 여자도 아니었고, 마음 놓고 욕망을 말할 수 있는 여자도 아니었고, “지금은 즐겨도 되는 시기”에 속한 적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라는 여자가 본래 그럴만하지 못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삶의 전반부가 어떤 연유로 인해 왜곡된것 뿐.


그런데 갑자기 사회는 말한다, “이제는 임신 가능성, 결혼 시기, 직장 조율, 비용, 책임을 고민해야 할 나이다.”


나는 마음이 힘들어지자 억울했던 기억들을 떠올렸다.

그것은 마찬가지로 내가 잠재워왔지만 끊임없이 떠오르며 시달려왔던 기억들이다.



첫번째. 지인의 건.


나에게는 나이가 동갑인 남성 지인이 있었다. 그 사람은 매우 가벼운 여성관을 가지고 있었다*. 스스로에 대한 객관화는 적었고, 좋은 상대를 만나기 위해 귀찮음과 부담을 참는 사람이 아니었다.

*너무나 가벼웠기에 농담인줄 알았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남성성은 아무런를 제한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욕망은 우스울정도로 쉽게 이루어졌다.


두번째. 양아치의 건.


2년 전에 나갔던 모임에서 음악을 하는 남자가 나에게 접근했던 적이 있다.

당시의 나는 양아치라는게 어떤건지 몰랐고, 한창 결정사에서 시달렸던 터라 이 사람의 가벼움을 좋게 느꼈던거 같다. 그 당시의 나는 이 사람의 이런 가벼운 태도가 아직 순수한것, 아직 연애감정이 남아있는 것이라고 착각했던것 같다.

하지만 이 사람은 나에게 거대한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다.

그는 말했다. 20대와 30대의 사랑은 다르니 내가 거기에 적응해야한다고. 자신은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가벼운 여자를 꼬시면 된다고...



나는 큰 박탈감을 느꼈다.

내가 겪었던 세상에서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렇다할 힘이 없었고, 나의 욕망은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었고, 나는 이렇게 힘든 과정을 겪고있는데

왜 이렇게 다를까? 같은 나이의 똑같은 사람인데?


몇년전의 나는 내가 겪어왔던 아주 작은 사회의 무거움과 공격성에 질려버린 나머지 공격성이 없는 사람, 가벼운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했던것 같다.

하지만 공격성이 없다고 해서, 무겁지 않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걸 몰랐던거 같다.



GPT한테 물어봤을 때는 이건 개인의 성숙도 문제가 아니라 성별 권력 차이라고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 생각이 다 맞는것일지도 몰라. 어쩌면 정말로 누군가는 특권을 누리고 있는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나는 바보같이 특권이라는 것을 누리면 정당하지 못한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왠걸, 세상은 원래 불공평한 것이고 아무도 특권을 뺀 나머지 부분의 자기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다.

나는 왜, 특권을 뺀 부분이 진짜 나의 가치라고 생각했을까?

아무도 그러지 않는데.

특권이 적은 사람조차 절대 그러지 않는데.

이 세상엔 뭐가 공평한것이고 뭐가 불공평한 것인지를 판단해줄 존재조차 없는데.


내가 스스로를 낮추려고 하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이 사람들의 가치를 이렇게 부풀려보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나는 처음부터 이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지금쯤 나에게 상처 따위는 남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누가 어떤 특권을 누리든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었을까?

맞아 그랬다면...지금쯤 박탈감 따위는 느끼지 않았을지도 몰라.


나는 내가 앞으로 2주간 겪어야할 힘든 일정에서 박탈감과 서러움에 마음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 2주의 일정 전후로 이런 기억을 안고있으면 나에게 큰 상처가 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일련의 혼란과 괴로움을 겪으면서 스스로에게 다짐한 것이 있었다.

내가 상처입으면 그것을 보상해줄 사람 따윈 이 세상에 없다고, 그 상처를 안고 불리해지는 것은 오로지 나 뿐이라고, 그러니까 무슨 일이 벌어져도 내 마음에 그 흔적을 남기지 않겠다고.


그렇다. 진짜로 누군가는 특권을 누리고있는걸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그 특권으로도 가벼움의 대가를 막아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가벼움의 대가.

그것은 끝없는 추위와 공허함이다.

그 큰 몸으로도 감히 견뎌낼 수 없을 정도로 사무치는 추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지금 당장은 자유로울지 모르지, 당장은 당당할지 몰라, 당장은 모든 것이 쉬울지 몰라.

하지만 누리는걸 당연하게 여기는 가벼운 사람들이 맞이할 인생의 결말이 결코 건전하고 따듯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일일이 억울해 하며 분노하지 않겠다.

쳐다보지 않겠다. 듣지 않겠다. 생각하지 않겠다. 기억하지 않겠다.

왜냐면 그 모든것이 얽히는 것이니까.

나는 그들과 얽혀 같은 행선지로 가고싶지 않다.


이 2주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을지 모르지만,

최소한 내 안에서 나를 방해하는것을 지우는것,

내 곁에 내 운기를 떨어뜨릴 사람들을 가까이 두지 않는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머지는 더 생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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