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기쁨과 아픔
나는 반지하에 살고 있다. 아무래도 기숙사에서는 못 살겠다고 생각해서 자취하게 되었다.(이것도 나중에 아버지께 통보한 것이다. 하하.) 기숙사는 아무리 좋다고 해도 각자의 생활이 존중받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선선한 여름밤이었다. 우리 집은 반지하기 때문에 창밖은 잘 보이지 않는다. 어두운 가운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밖이 시끄러워 창문을 봤는데, 웬 고양이가 발로 창문을 긁으며 들어오려 하는게 아닌가.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빗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창문은 빗물이 못 들어오게끔 건물로 한 겹 더 덧대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 고양이는 밥을 조금 얻어먹었다. 내가 알바비를 털어 사 온 츄르와 통조림 두 개를 전부 먹어버리고서는 현관문을 열어주니 바로 나갔다.
귀여운 고양이가 창문에서 나를 부르며 눈을 맞출 때, 사실 키우고 싶었다. 반려동물을 키우면 안되는 원룸의 특성상 나는 고양이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 고양이의 목청이 너무 커서 키울 수가 없었다. 이 원룸만큼 싼 곳은 없는데, 만약 쫓겨나기라도 하면 다시 방을 잡을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 고양이는 우리집 주변이 자기 구역인지 자주 마주치고, 마주칠 때마다 치대고 간다. 호랑이처럼 용맹한 줄무늬에 갈색 털, 거기에 귀여운 흰색 양말을 신고 있는 고양이는 볼 때마다 귀엽고 좋다.
창문을 열고 들어온 고양이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싶어 커뮤니티에 올리기로 했다. 창문을 열고 들어온 고양이의 이야기를 커뮤니티에 올리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간택을 당했으니 키우라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내가 현관문을 열고 보냈다는 것을 알자, 반응은 미적지근해졌다. 사람들은 내가 그 고양이를 받아들였을 때만 감동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흥미를 잃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왜 이야기는 끝이 따뜻하지 않으면 안되는 걸까? 창문을 열고 들어온 고양이와의 짧은 인연은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 존재가 나가지 않았다면 키웠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안겨오는 것을 사랑하는 것만큼 떠나는 것을 허락하는 것도 사랑이라고 믿는다.
고양이가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엔 귀엽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놀랍고 두려웠다. 내가 한 생명을 책임지기엔 많이 부족한 사람이구나 느낀다. 한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은 단순히 밥을 주고, 잠자리를 마련해주는 것 이상의 일이다. 생명을 맡는다는 것은 함께 살아간다는 약속이자 책임이다. 그 생명이 건강한 날도, 아픈 날도, 기분이 좋은 날도, 이유없이 날카로워지는 날도 함께하는 것이다. 단순히 잠깐 귀여워서 데려오면 그 생명에게 상처를 남길 수도 있다. 고양이가 방을 걸어갈 때 나도 잠깐 키우면 어떨까, 생각도 했다. 나는 그런 마음에 고양이를 놓아주게 되었다. 책임감이 없기도 하였지만, 사료비며 캣타워며 이것은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나는 알바비가 밀리면 밥을 굶기도 하는데 말이다.
고양이를 놓아주고 나서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비에 젖어 춥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고, 혹시나 차 사고를 당하지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길거리에서 잘 살아가는 호랑이같은 무늬의 귀여운 고양이를 보면 내가 한 행동이 괜한 짓은 아니었다는 생각도 든다. 고양이는 자유롭게 사는 것이 맞다.
사실 동물이 찾아온 일이 전에도 있었다. 한 달 전, 둥지에서 떨어져 고양이의 위협을 받을뻔한 아기 물까치를 이틀 동안 임시 보호한 적도 있다. 엄마를 찾아주려 주변을 물까치와 주변 곳곳을 어슬렁거려 보았지만, 엄마를 찾을 수 없었다. 처음 물까치가 우리 손에 잡혔을 때, 물까치는 남자친구의 손을 피해 도망을 조금 다녔으나 곧 잡히게 되었다. 잡히고나서는 저항을 하지 않고 조용히 손안에 들어가 있었다.
우리는 그런 아기 물까치에게 어벙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어벙하게 있다가 고양이가 오는 것도, 사람이 오는 것도 모르고 가만히 있는다는 특징 때문이다. 하지만 이름은 반대로 된다는 옛말이 있듯이, 어벙이도 지금은 똘똘한 새로 성장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한다.
이틀 동안, 나는 하루 세 끼의 밥을 먹일 때마다 밀웜을 스무 마리씩 줬다. 밥을 먹고 나면 작은 똥을 손에다가 싸서 그 새가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똥은 더러웠지만, 나는 알 수 없는 기분에 젖었다. 나는 어벙이의 보호자였고, 그 아이는 나를 잠깐 믿어준 작은 생명이었다.
어벙이가 똥을 싼 곳은 비단 내 손이나 남친의 손뿐만은 아니다. 남자친구는 해병대 출신인데, 지금은 색이 약간 바랜 해병대의 빨간 수건이 있다. 침대 머리맡에 걸어두는 그 빨간 수건은 남자친구의 자랑이자 약간 자부심같은 것이었다. 밥을 다 먹은 어벙이는 화초에 숨어들었다. 화초는 침대 쪽에 있었는데 남자친구가 화초를 잘 키워서, 침대 헤드 위로 올라오는 큰 화초 사이에 어벙이는 숨어들었던 것이다. 크고 예쁜 극락조 이파리는 새 발톱으로 찢어발기며, 자신이 설 자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 위에서 어벙이는 식후에 아주 당당하게 똥을 쌌다. 진짜 그 수건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틀 동안 그 위에서만, 손위에서만 똥을 쌌다. 해병대 빨간 수건은 배변 때문에 얼룩덜룩해졌다. 그래도 아기 새를 탓할 수는 없어서 그냥 뒀다.
이틀 동안, 나는 아기 새의 비서이자 돌보미였고, 급식 담당이자 배설물 청소부였다. 손은 금세 더러워졌지만, 신기하게도 마음 한켠이 따뜻해졌다.
어벙이는 손을 잘 타는 아이여서 어떤 특별한 일이 없어도 손 위에 곧장 올라타곤 한다. 이대로면 남자친구가 말하길 야생성이 없어져서 진짜로 야생에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나는 외면하고 있었지만, 어벙이는 야생에서 살아야만 했다.
이틀째 아침, 나는 그 아이를 손에 올리고 산책을 했다. 손을 횃대처럼 사용하는 그 아이는 이미 야생성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아기 새는 날아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 듯해 보였다. 이대로 우리랑 살게 되면 굉장히 잘해줄 것이지만, 괜히 데리고 와서 평생 물까치들과 어울려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었다. 때가 되면 어른이 되어 새끼를 낳고 사랑도 해야하는 작은 생명이 그 모든 것을 누리지 못할까 덜컥 겁이 났다.
날아가고 싶으면 날아가고 아니면 우리 같이 살자고 나는 생각하였다. 말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그렇게 전했다. 산책을 하며 원래 있던 곳으로 가니 물까치들의 서식지가 나왔다. 물까치들은 자신만의 소리로 울고 있었고, 어벙이는 그 소리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물까치는 망설이는 듯해 보였다. 그리고 그때, 멀리서 들려오는 물까치의 울음소리.
물까치는 내 손을 박차고, 풀숲으로, 나무로 날아갔다. 그 솜털이 송송 나 있는 뒤통수가 작아질수록, 나는 이상하게도 속이 후련하면서도 조금은 뻐근했다.
지금은 세탁해서 뽀송해진 빨간 수건을 보면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내 손 위에 잠시 머물렀던 한 생명의 눈동자도.
고양이도 아기 물까치도 자유를 누리며 삶을 만끽했으면 좋겠다. 무조건 사람 손에서 동물이 자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야 그들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 또한 자신을 닮은 새끼를 낳고 키우고, 자기를 사랑해 주는 짝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다만 잠시 스쳐 간 인연일 뿐이라도, 그들이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조용히 문을 하나 열어줄 수 있는 존재이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