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글 40 꼭지 프로젝트 3
흔히 치매가 가족을 멀어지게 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어쩌면 마음을 먼저 갈라놓는 것은 병이 아니라, 나눌 정이 쌓이지 못한 빈곤한 추억인지도 모른다. 정은 강요로 생기지는 않는다. 함께 느낀 시간이 기억될 때 정이 자란다. 정을 나눈 추억이 없다면 혈육일지라도 마음은 멀어진다.
최근 한 달 동안 거의 매일 찾아보는 유튜브 채널이 있다. 마흔 중반의 미혼 아들과 아흔둘의 아버지, 그리고 여든넷의 치매 어머니가 함께 사는 일상을 기록한 영상이다. 아들의 하루는 끝없이 반복되는 끼니와의 싸움이다. 방금 차려준 밥을 먹고 방에 들어간 어머니는 5분도 안 되어 까맣게 잊어버린다. 아들이 밥을 안 챙겨줘 굶어 죽을 지경이니 예수님이 도와달라며 울며 기도한다. 어머니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배고프다는 말이 다일 정도다. 아들은 한숨을 쉬며 가스 불을 켜고 다시 식사를 준비한다. 그 고단한 일상이 영상에 꾸밈없이 담겨 있다.
감정이 폭발한 어느 날 외아들인 그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부모님께 따뜻하게 안겨본 기억이 없어요. 다섯 살 때 엄마 보고 싶어 가게로 찾아갔을 때 왜 왔냐며 매만 맞았어요. 어린이날 놀이동산 가고 싶다고 애원했을 때 마지못해 데려간 아버지는 그 무서운 청룡열차를 나 혼자 타게 했고, 내가 뭘 먹고 싶은지 물어보지도 않고 도토리묵을 사줬어요. 나는 그때부터 엄마를 보고 싶어 한 적 없고, 묵을 가장 싫어하는 음식이 됐어요." 장사에 바쁜 어머니 대신 친척 집을 오가며 자랐고, 열여섯 살에 홀로 미국으로 건너간 이야기가 이어졌다.
가장 먹먹했던 장면은 아들이 아버지의 손톱을 깎아주던 순간이었다. 아들은 검은색 장갑을 끼고 있었다. 너무 깔끔한 성격이라 위생을 생각하는구나 싶으면서도 이질감이 들었다. 언뜻 희미하게 지나가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솔직히 나는 아버지와 살이 닿는 것도 싫다."라는 자막이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어쩌면 스킨십의 계절 같은 게 있는지도 모른다. 그 계절을 지나쳐 버리면, 서로의 체온조차 낯설어지는 남 같은 사이가 돼버리지 않을까. 한국에서 부모님을 모셔와 7년째 LA에서 같이 살고 있다는 아들. 끊었던 담배를 꺼내 물고 마당에서 연기를 뿜어내던 뒷모습이 안개만큼 답답해 보였다.
영상을 보다가 영상 속 어머니와 같은 나이인 막내 이모가 떠올랐다. 이모는 내게 각별한 사람이다. 부모님 형제 중 마지막 남은 어른이기도 하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이모는 우리 집에서 함께 살며 초등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내가 네댓 살 무렵 이모는 시집을 갔고 늘 서로 왕래하며 맏언니나 다름없는 친밀감을 유지했다. 그러다 다시 한 집에 살게 된 기간도 있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이모네 다섯 식구가 우리 집 방 하나를 차지해 살았다. 그 방은 방 두 개를 합친 것만큼 우리 집에서 제일 큰 방이었고 가운데 방에서 부모님, 나와 동생은 부엌에 딸린 마루방에서 지냈다. 사실 한 달만 살다 나가겠다고 들어왔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아 엄마와 사이가 벌어지는 계기가 됐다. 좁고 북적이는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나는 어른들의 갈등보다 이모와 같이 있는 게 그저 좋았다. 그 이후로 기껏 이사 간 게 바로 옆 골목이었다. 사람은 떠나 빈집이지만 아직까지 골목을 사이에 두고 고향에 그대로 자리하고 있다. 이모는 나를 보며 "우리 성희는 어쩜 이리 이쁠까"라며 다정하게 표현해 주었다. 쓸모없는 계집아이들이란 말이 뇌리에 박혀있던 사춘기 시절, 이모는 은연중 나의 존재감을 심어주었다. 사소한 그 말이 아직도 귀에 남아 치매 병원에서 지내는 이모를 그리워하고 있다.
당대 유명 여배우 뺨치게 미모가 뛰어났던 이모는 나의 우상이었다. 엄마와는 외모도 성격도 닮은 데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평생 젊고 건강할 것 같던 이모가 치매 환자가 되어 요양병원에 계신다는 사실이 처음엔 실감 나지 않았다. 멋 내기를 좋아했고 남에게 허튼 꼴 안 보이려 철저히 단속하는 욕심도 많았던 분이었다. 그런 이모가 헝클어진 백발에 멍들고 찌그러진 이 빠진 노인네로 변해버렸다. 뇌졸중으로 몸이 불편하신 엄마를 모시고 이모 집을 찾아갔을 때, 엄마는 요양병원에 데려다 두고 너만 자고 가라 했던 그 이모가 이제 요양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평생 요양병원 갈 일 없을 줄 알았는데.
아들과 딸 외에 사위도 못 알아보던 이모는 다행히 나를 또렷이 알아보았다. 나는 손을 잡고 밝은 표정을 지으며 예전처럼 대하려고 애썼다. "고맙다, 이렇게 와줘서." 이모의 곱던 목소리는 이제 쇳소리가 섞여 낯설었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유튜브 속 아들과 나. 우리는 서로 다른 자리에 서 있다. 그는 장갑을 끼고 아버지의 손톱을 깎고, 나는 맨손으로 기꺼이 이모의 손을 감싸 쥔다. 그 차이는 어디서 온 것일까. 우리는 흔히 천륜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을 당연한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사랑은 억지로 생겨나는 감정이 아니다. 함께 밥을 먹고 한 지붕 아래 부대끼며 살았던 그 시간들. 허기를 채워주는 따뜻한 손길이 쌓이면서 정도 자라난다. 저수지에 물이 고이듯 정이 불어나면 훗날 부모가 노쇠라는 가뭄을 맞이했을 때 자식은 길어올릴 물이 풍부해진다. 그 물로 돌봄이라는 긴 시간을 견뎌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기억할 추억이 없는 자식에겐 돌봄은 사랑의 되돌림이 아니라 숙제 같은 도리로 조여올 뿐이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것을 남기려고 애쓴다. 돈도, 집도, 이름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사람을 붙잡아 두는 건 함께 했던 시간의 기억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추억은 그저 지나가는 한 조각의 기억이 아니다. 서로를 붙잡아 줄 끈끈한 돌봄의 원천이 된다.
하략 下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