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글 40 꼭지 프로젝트 8>
컴퓨터 앞에서 마우스를 움직이던 손목이 갑자기 욱신거렸다. 순간 손을 멈췄다. 요즘 손목을 너무 혹사시켰다. 자세도 엉망인 채로 몇 시간씩 글을 쓰고 있으니 몸이 먼저 항의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 손목은 한 번 크게 다친 적이 있다.
2021년 봄이었다. 넘어지면서 오른쪽 손목이 부러졌다. 반깁스를 한 채 거의 일 년 가까이 고생했다. 양손으로 하던 일을 한 손으로 해결해야 했다. 나는 오른손잡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발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발이 부러졌다면 걷는 것부터 막막했을 것이다. 사람은 참 묘하다. 불편한 상황에서도 더 나쁜 경우를 상상하며 스스로를 달랜다.
의사는 될 수 있으면 손목을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손목을 쓰지 않으려다 보니 어깨까지 덩달아 굳어 있었다. 처음에는 답답했지만 사람은 금세 적응한다. 그 상태로도 생활은 굴러갔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어깨가 아프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통증은 점점 심해졌다. 밤에 자다가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오른쪽으로 돌아눕는 것조차 어려웠다.
손목 치료를 위해 병원을 다녔지만 어느 의사도 어깨까지는 살펴보지 않았다. 넘어질 때 함께 충격을 받았던 것인지, 반깁스로 오래 고정되어 있었던 탓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손목에 집중되어 있던 내 관심은 어느새 어깨로 올라가 있었다.
동네에서 어깨 전문 병원을 찾았다. 이름도 묘하게 기억에 남는다. 만세 한의원이었다. 실내 분위기는 일반적인 한의원과 달랐다. 정형외과인지 헷갈릴 정도로 로비엔 어깨 재활에 관한 기구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의사는 손을 뒤로 돌려보라고 했다. 올릴 수 있는 만큼 올려보라고 했다. 하지만 팔을 움직이려는 순간 억 소리가 절로 나왔다. 열중쉬어 자세는 시도조차 어려웠다.
진단은 생각보다 냉정했다. 어깨 회전근이 석회화되어 있어 예전 상태로 돌아가는 건 어렵다는 말이었다. 그냥 이렇게 불편한 채로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선언문이었다. 그럭저럭 반년 가까이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팔은 만세는커녕 20도, 30도도 제대로 올라가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어깨에 좋다는 것은 뭐든 하기 시작했다. 온도를 높여 원적외선이 나온다는 속옷으로 전부 바꾸고, 먹고 바르고 스트레칭도 했다. 그렇게 한두 해 시간이 흐르자 어느 순간 통증이 사라졌다. 지금은 팔을 번쩍 들 수 있다. 만세도 되고 180도 회전도 가능하다.
신기한 건 사람 마음이다. 그렇게 아플 때는 온 신경이 어깨에 쏠려 있었는데, 지금은 언제 아팠는지조차 잘 떠오르지 않는다. 몸이 괜찮아지면 우리는 금세 잊어버린다. 그 몸이 얼마나 고맙게 우리를 버텨주고 있는지.
나는 내 손에 불만이 많았다. 손이 작고 여성스러웠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다. 다른 친구들과 달리 내 손은 남자 손처럼 큼직하고 손마디도 굵다. 그래서 악수하는 걸 조금 꺼린다. 특히 날씨가 추울 때면 차가운 손이라는 인상만 남길까 봐 괜히 손을 뒤로 감추고 싶어진다.
그런데 이 손은 한때 피아노를 위해 각별히 아끼던 손이었다. 집안일을 할 때도 반드시 면장갑을 끼고 그 위에 고무장갑을 덧껴서 보호했다. 건반 위에서 움직일 때만큼은 크고 굵은 손마디가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든든했다.
그 손이 전혀 다른 곳으로 가게 된 건 50대 초반 무렵이었다. 엄마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게이트볼 선수로 국제심판 자격까지 가지고 활동하던, 에너지 넘치던 엄마가 요양병원 한 귀퉁이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왕복 열 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를 오르내리며 엄마 곁을 지켰다. 처음엔 반신불수로 꼼짝도 못 하셨지만 차츰 거동이 가능해지자, 내려갈 때마다 렌터카로 엄마를 모시고 다녔다. 1박 2일 외출증을 끊어 고향 집에도 가고, 게이트볼 친구분들도 찾아다녔다. 엄마의 추억이 서린 장소로 바람도 쐬고, 흑염소탕에 곰탕도 사드리고 미용실에 가 머리 손질도 해드렸다. 우울하게 지내던 엄마는 차 안에서 노래를 부르며 활짝 생기가 돌았다. 내 나이가 어때서, 당신 참 얄미운 사람. 엄마의 애창곡들이었다. 뇌졸중 이후 발음이 어눌해진 엄마에게 나는 노래를 부르며 발음 연습을 시켜드렸다. 봉사 나온 레크리에이션 시간에 요양병원 로비에서 마이크를 잡고 노래 부르는 엄마를 보기도 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자 카드빚이 늘어 있었다. 수입이 변변찮은 상태에서 지출은 계속되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팔을 걷어붙이고 막일에 뛰어들었다.
처음 한 일은 호텔 세탁실이었다. 면접을 본 사십 대 젊은 부사장은 내 경력이 전혀 없다는 걸 파악하고도 세탁실을 내 동선에 맞게 꾸려주었다. 세탁기도 내가 편하게 쓸 수 있도록 세팅해 주었다. 세탁기에 넣고, 건조기로 이동하고, 다 된 빨래를 꺼내 개켜 놓으면 다른 직원이 와서 가져가는 식이었다. 주로 다루는 건 크고 작은 타월과 가운이었다.
세탁실은 호텔 뒤 작은 정원과 이어져 있었다. 시간이 널널할 때면 밖에 나가 햇볕을 쬐기도 했다. 세탁실 안에는 늘 음악 방송이 흘렀다. 음악을 들으며 일하니 피곤한 줄 몰랐다. 누가 시끄럽다고 시비 걸 일도 없는 독립된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배려해 준 부사장이 고마웠다.
-하략 下略 -
초고 내용은 어떻게 바뀌어 책이 될까요?
여러분의 좋은 의견도 알려주시면 잘 반영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