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제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자유 글 40 꼭지 프로젝트7>

by 정성희




내 손은 크다. 남자 손처럼 큼직하고 손마디가 굵다. 심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그렇다. 어릴 적 겨울마다 동상을 달고 살았던 흔적이다. 여섯 식구 중 유독 나 혼자만 손가락 발가락에 얼음이 박혀 부르텄다. 지독하게 추위를 타는 체질로 태어난 데다 장갑을 낀 기억도, 두툼한 겨울 외투를 입은 기억도 나질 않는다. 찬바람에 노출된 피부는 늘 빨갛게 부어 있는 게 당연한 일상이었다. 희한하게 나이가 들면서 동상은 사라졌다. 스스로를 방어하는 능력이 생긴 것이리라.



손에 콤플렉스가 있는 나는 악수하는 걸 꺼린다. 특히 날이 차가워질 때면 차갑고 큰 손이라는 인상만 남길까 봐 손을 뒤로 감추고 싶어진다. 손이 조그맣고 여성스러웠으면 좋겠다고 오래 바랐다. 그 손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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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 어디선가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면 나도 모르게 발이 멈췄다. 띵똥 꺼리는 그 소리가 담장 너머로 새어 나오기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 어떤 음악을 들어도 내 귀는 늘 피아노 소리를 먼저 찾았다.


가난한 형편에 피아노를 배울 엄두는 못 내고 자랐다. 초등학교 5, 6학년 때 밴드부에서 멜로디언과 작은북을 치는 정도가 전부였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던 해, 오빠는 상고를 졸업하고 국민은행에 입사했다. 서울에서 집에 올 때마다 음반을 사 들고 왔다.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 바다르체프스카의 소녀의 기도. 레코드판위에 바늘이 얹혀 돌아가며 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무 자주 들어 바늘이 톡톡 튀거나 지지직 걸리기도 했다. 그래도 질리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엄마 손에 이끌려 작은 유한회사에서 경리 일을 시작했다. 잘 맞지 않았다. 수리에도 약하고 고객이 들어와 주문할 때 얼굴도 제대로 못 들어 기억을 못 하니 실수만 연발했다. 출입문을 빠끔 열고 "맥주 열 박스, 소주 다섯 박스요" 외치고 가면 선배 허양 언니는 척척 주문서를 처리했지만, 나는 도통 어리바리해 발전할 기미가 없었다. 주류 주문서나 처리하는 이 구멍가게 같은 곳이 내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퇴근하면 입이 튀어나왔다. 반년을 채우지 않고 그만두었던 것 같다.



그 쥐꼬리만 한 월급을 모아 엄마는 소원하던 피아노를 사주었다. 첫 월급을 받자마자 내가 한 일은 피아노를 가르치는 일 년 선배에게 등록하는 것이었다. 그 시절에는 전공하지 않고도 자유롭게 교습소를 차릴 수 있었다. 선배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만했다. 주말마다 도시로 나가 레슨을 받고 와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시스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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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따라 했다. 바이엘을 떼자마자 어린아이들에게 레슨을 시작했다. 아이들을 모아온 건 엄마의 입김이었다. 어쩌다 보니 군수 딸까지 데려왔다. 나는 체르니 30번에 들어가면서 선배가 다닌다는 교수에게 연결이 되어 일주일에 한 번씩 개인 레슨을 받으러 다녔다. 재미있었다. 그리고 알았다. 선배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를. 처음 잘못 배운 습관을 바로잡는 데 오래 걸렸다.



여교수 아파트에 가면 방음이 잘 된 넓은 방에 그랜드 피아노 두 대가 놓여 있었다. 80년대 당시 시간당 5만 원이었다. 스케줄은 시간마다 꽉 차 있었다. 현직 대학교수이면서 과외로 벌어들이는 돈이 상당할 거라는 짐작이 들었다. 아무튼 나는 배우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내 손이 건반 위에서 움직일 때만큼은 크고 굵은 손마디가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든든했다.



그러다 상처를 받았다.


군수 부인은 엄마와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다. 광주 친구 집에 갈 때 나를 데리고 간 적이 있었다. 충장로 유명 양품점에서 정장 투피스까지 맞춰주기도 했다. 친구 집은 정원에 나무가 울창한, 시골뜨기 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이층 양옥 대저택이었다. 나는 수강생인 큰딸을 데리고 다른 아이들과 피아노가 있는 방에서 놀고 있었다.


그때 문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얘 넌 왜 아이 교육에 신경 안 쓰니. 음대 생도 수두룩한데 전공도 안 한 촌뜨기한테 맡기면 어떡해.“



들으라는 듯 거침없는 목소리였다. 칵테일 효과였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속에서도 그 말만큼은 선명하게 귀에 꽂혔다. 나는 순식간에 주눅이 들었다. 동시에 어렴풋이 감지했다. 군수 부인이 나에게 베푸는 것들이 엄마와의 모종의 거래에서 비롯된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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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수는 명문대를 나와 행정고시에 일찍 패스해 승승장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남편을 둔 군수 부인은 겉으로는 풍족해 보였지만 남편 모르는 빚을 많이 안고 있었다. 그 빚을 돌려 막기 위해 돈을 빌려달라고 한 것이다. 한 학년 아래인 내 동생도 졸업해 엄마 덕에 군수 비서실에 근무하고 있었다. 군수 부인은 꽤 많은 돈을 엄마에게 빌려 갔다. 엄마는 빌려줄 돈이 없으니 주변에서 대신 빌려다 건네주기도 한 것 같았다. 나중에 남원시장으로 발령이 나서 엄마를 따라 관사에 간 적이 있었다. 잔디가 넓게 깔린 일본식 가옥 같은 넓은 집이었다. 미닫이문을 열고 슬리퍼를 갈아 신고 들어가며 이런 호사를 누리고 사는 부인은 얼마나 행복할까 부러웠다. 그런데 엄마와 군수 부인이 나누는 대화가 귀에 걸렸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곧 마련할 거예요. 얘들 아빠 알면 큰일 나요." 목소리를 낮춘 그 말이 집 안 공기를 축축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 호의의 이면을 그날 처음 알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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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 콤플렉스는 그날 이후 오래 따라다녔다. 그래도 집에 피아노 두 대를 두고 교습소를 이어갔다. 건반을 두드리는 동안만큼은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스물셋 겨울, 다시 공부가 하고 싶어졌다. 광주 대학 도서관학과에 들어갔다. 경상전문대에서 4년제로 승격하면서 시험 봐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내 힘으로 뭔가를 선택한 첫 번째 일이었다. 도서관학과는 지금의 문헌정보학과인데 주말의 명화를 보다 어느 주인공이 사서였다. 그게 너무 멋져 보여 환상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탐탁지 않아 했다. 여자는 시집가면 그만이라며 억지로 결혼을 성사시켰다.






-하략 下略 -



초고 내용은 어떻게 바뀌어 책이 될까요?


여러분의 좋은 의견도 알려주시면 잘 반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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