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한 일과 중요한 일 사이에서

자유 글 40 꼭지 프로젝트 6

by 정성희




정리 잘하는 사람이 일도 잘하고 성공도 한다는데, 나는 정리가 참 안 된다.


일도 인간관계도 글쓰기도 산만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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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랬다. 외출할 일 없을 거라 생각하고 느긋이 아침을 먹으며 건강 강의를 들었다. 11시쯤 줌 미팅을 마치고 글 한 편 쓰려고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마음을 다잡고 몰입하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친한 동생이었다.


"언니, 점심 먹자. 덕작가님이 보자고 연락 왔어."


덕작가님. 내가 참 좋아하고 보고 싶던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 나가면 서너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갈 것이고, 모처럼 붙잡은 글의 실마리는 연기처럼 사라질 터였다.


"오늘은 좀 그렇다, 밀린 일이 많거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동생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언니, 나도 바쁘고 덕작가님도 엄청 바빠. 안 바쁜 사람이 세상에 어딨어? 이번에 안 보면 또 언제 만나? 덕작가님 다음 달에 멀리 이사 가신대."


결국 "알았어" 하고 전화를 끊었다.



장소는 군자역 부근 백제 추어탕집이었다. 추어탕을 좋아하는 나를 배려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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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나가니 좋았다. 덕작가님은 여전히 에너지가 넘쳤고, 따뜻한 추어탕 한 그릇 앞에서 나눈 이야기들은 집 나설 때 불편했던 마음을 말끔히 걷어갔다. 덕작가님은 나에게 줄 반찬까지 챙겨 들고 나왔다. 늘 얻어먹기만 하니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그런데 세상 걱정 하나 없을 것 같던 덕작가님도 요즘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했다. 이사 갈 집을 먼저 계약해 놓고 지금 사는 집을 내놓았는데, 집 보러 오는 사람이 없어 속이 타들어 갔다는 것이었다. 주상복합 아파트인 데다 평수가 커서 거래가 쉽지 않은 상황에, 부동산에서는 급매가 쏟아지니 가격을 더 내리라고만 했다고. 결국 일억을 손해 보고 계약을 성사시킨 사연이었다. 사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다며 하소연도 하고 스트레스도 풀 겸 밥이나 먹자고 제안한 거였다고 했다.


나는 나오길 잘했다고 안도했다. 힘들 때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수 있으니까. 그 적절한 타이밍에 거기 있어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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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집으로 자리를 옮겨 수다를 마무리하고 웃으며 헤어졌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마음이 바빠졌다. 만남은 좋았다. 그런데 글은 못 썼다. 둘 다 가질 수는 없는 것인가. 아니면 순서를 잘 정했다면 둘 다 가질 수 있었을까. 버스 창밖을 보며 혼란스러웠다.



버스는 제 길을 가는데 나는 왜 이렇게 갈피를 못 잡는 걸까. 전날도 전혀 예정에 없이 동네 친구에게 갑자기 불려 나가 저녁 식사를 하고 왔다. 어제 허비한 시간을 오늘은 꼭 만회해야 했는데 또 이렇게 흔들리다니.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 때문일까. 주변에서는 나를 결정 장애라고 놀리기도 한다. 부정할 수 없었다. 작은 선택 앞에서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내가 가끔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비단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만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문제는 순서가 없었다는 것이다. 삶에 명확한 우선순위가 없으니 매 순간 모든 것이 동등해 보인다. 급한 일이 오면 중요한 일이 밀려나고, 반가운 일이 오면 필요한 일이 뒤로 처진다. 결정 피로는 우유부단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기준의 부재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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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를 못 하는 습관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매일 무언가를 끄적였다. 카페에서 떠오른 문장, 책을 읽다 밑줄 친 구절, 새벽에 불현듯 스친 아이디어. 노트북 메모장, 수첩, 달력, 스마트폰 메모 앱, 심지어 영수증 뒤에도. 손이 닿는 모든 곳에 생각의 파편들을 남겨 놓았다. 그런데 글 한 편이 완성된 적이 없었다.



언젠가 노트 한 귀퉁이에 적힌 문장을 발견하고 놀란 적이 있다. 내가 이런 문장을 써 놓았단 말인가 싶어 감동했다. 그렇게 감동한 걸 보면 어느 명 저자의 글을 베껴 놓은 건 아닌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런 문장들이 정리되지 못한 채 어딘가에 묻혀 있다는 것이 아깝고 또 아깝다.



메모의 완성은 메모가 아니다. 한 편의 글이다. 낙서의 완성은 낙서가 아니라 독자의 가슴을 울리는 에세이다. 정리가 안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순서가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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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요즘 소원이 하나 생겼다. 컴퓨터 속 AI 비서가 아니라 사람처럼 내 옆에 딱 붙어 앉아 착착 도와주는 피지컬 AI 비서. 내가 영수증 뒤에 끄적인 메모를 알아서 찾아 정리해 주고, 흩어진 파일들을 꺼내 원고로 엮어주는 그런 존재. 그날이 언제 올지 모르겠다. 비쌀 테니 돈도 많이 벌어야겠다. 그러려면 결국 지금 이 글을 써야 한다. 빙빙 돌아 제자리다.



-하략 下略 -







초고 내용은 어떻게 바뀌어 책이 될까요?


좋은 의견도 알려주시면 잘 반영하겠습니다.


그리고 저처럼 이런 식으로 같이 해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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