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머슴이 좋았다
요즘 대학 졸업생들의 취업에 대한 고민을 비교해 보면 1994년 졸업생들은 나름 행복했던 것은 분명하다.
1997년 대한민국에서 IMF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 호전되고 있는 대외환경과 국내기업의 실적 개선은 많은 신입직원들을 앞다퉈 채용 가능하게 함으로써 대학을 졸업하면 보통 2~3개 대기업에 동시에 합격하여 어느 기업이 조건이 더 좋고 비전이 있는지를 따질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87학번으로서 데모하느라 거의 2년을 학업보다는 민주화 투쟁과 놀기에 바쁜 일상을 보내었던 나는 계속 이렇게 살면 안 될 거 같은 느낌이 들어 정신을 차리기 위해 지원한 군복무를 마치고 3~4학년동안 바짝 집중하여 성실성에 문제가 없을 정도의 학점을 겨우 맞혔지만, 속칭 SKY출신도 아닌 내가 여의도 증권회사에 3군데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시대를 잘 만난 운인 것은 분명하다. 돌이켜 요즘의 대학생들의 노력과 실력을 단순 비교한다면 아마도 1차 지원서조차 통과하지 못했으리라....
1994년 12월 1일 꿈에도 그리던 직장인이 되었다. 꼭 한 번은 경험하고 싶었던 대기업 연수원에서 하루 3끼를 푸짐하게 제공받으면서 하루종일 유명강사의 세미나를 듣고 밤에는 단합 술자리를 가지며 공짜로 술과 음식을 무한정 먹을 수 있었으며 월급날에는 내 계좌에 그때 당시로는 적지 않은 돈이 딱딱 계좌에 입금되니 정말 아무 걱정 없이 멋진 미래가 펼쳐질 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름 행복했다. 부모님과 친척들의 축하와 원하던 증권회사로의 입사는 젊고 패기만만한 나의 자존감을 고취시켜 주었다. 부서 배치의 복도 따라 주었다. 당시 해외비즈니스의 확대로 인해 젊은 인력이 필요했던 국제영업팀에 배치되어 매일아침 뉴스에서 보던 것처럼 모닝미팅을 뉴욕 및 취리히 동경지점들을 연결하여 거의 매일 콘퍼런스 콜을 진행하며 당시에는 접하기 힘들었던 국제 경제 상황을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받으니 마치 내가 중요한 사람이 된 거 같은 착각도 들기도 했다.
뭔가 능력 있고 멋져 보이는 선배님들을 통해 새로운 업무를 그저 배우기만 했는데 한 달 뒤엔 또 월급이 들어왔고 분기말엔 회사 실적이 더 좋아졌다고 아무 일도 안 한 거 같은 나에게도 갑자기 성과급을 준다고 하니 신입사원으로서 좋은 회사에 입사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또한 몇 년을 일하면서 회사에 적응을 하니 해외파견의 기회도 곧 주어질 거 같은 이야기가 들렸다. 드디어 유학을 다녀오지 못한 아쉬움을 이렇게 보상받을 수 있겠구나 하고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런데 97년부터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당시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외환유동성 위기가 있었는데, 우리나라도 종합금융사의 무리한 외환차입과 대기업들의 문어발식 확장이 탈이 나기 시작하면서 30대 대기업 중 17개가 부도가 나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고 내가 다니던 회사도 해외펀드에 매각되면서 당시 같이 일하는 직원들 중 절반 가까이 해고를 당하는 일이 순식간에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그렇게 실력 있고 멋져 보였던 선배들은 한방에 훅 간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빠르게 정리되었고 당시 사원이었던 내 윗 직급 대리급 선배들도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제야 현실이 자각되었다. 우리나라가 그렇게 대단한 나라가 아니었구나, 대기업도 위험관리를 제대로 안 하면 망하는구나 그리고 그동안 나를 비롯해 직원들이 운이 좋았던 거지 정말 실력이 있어 누려왔던 것은 아니었구나 하는 자책과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이제 대기업 꼬마 머슴은 그동안의 철없고 따듯했던 시절을 뒤로하고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겸손한 마음으로 변화를 준비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