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공과 5 공의 재조명

by 최봉기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 중 하나가 특정 인물의 평가가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평가에 사적인 이해관계나 감정이 개입될 경우 공정성이 깨어질 뿐 아니라 진보, 보수 등 개인적인 고착화된 시각도 장애 요소가 되어 피평가자의 평가가 도매로 넘어가 버린다. 진보란 말만 나오면 죄다 '빨갱이', 보수란 말만 나오면 죄다 '태극기 부대'식이 되어버릴 경우 올바른 평가가 나올 수 없다. 현재의 대통령의 경우도 극단적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한 인물의 획일적 평가보다 통치자로서 했던 일들을 '공과 과'로 구분하여 냉정하게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할 듯하다.


4.19로 1 공화국이 무너진 후 육군 소장 한 명이 권력의 야망에 불타 1961년 5.16일 혁명이란 구호를 외치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 1963년 8월 전역식을 할 때 "다시는 이 나라에 나처럼 불행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라고 하며 10월 대통령 선거에서 약 15만 표 차이로 간신히 당선된다. "다시는 ~불행한 군인 ~"이란 말은 쿠데타는 내가 마지막이니 혹여나 그럴 생각 말란 말이다. 박정희는 자신이 저지른 쿠데타에 대해 트라우마가 있어 자신이 했던 것과 똑같은 형태의 쿠데타를 가장 두려워했고 북의 남침은 그다음이었다. 그 후 두 번 대통령 임기를 채운 후 1969년 9월 3선 개헌을 변칙 통과시켰고 10월 투표를 통해 유권자 찬성을 얻는다. 그 후 1971년 4월 대선을 통해 야당 후보 DJ를 약 95만 표 차로 물리치고 1972년부터 유신체제를 앞세우며 장기집권에 들어갔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1년 전 이미 3선 개헌이 끝났고 2학년 때 대선을 치렀으며 4학년이던 1973년 4월 윤필용 수경사령관이 중정부장 이후락에게 "박 대통령은 노쇠하셨으므로 형님이 후계자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한 말이 문제가 되어 쿠데타 모의 음모로 수세에 몰린 이후락이 자신의 처지를 반전시키려 꾸몄다는 '김대중 납치사건'이 그해 8월 발생한다. 그 후 5학년이던 74년 1월 헌법 개정 논의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1,2호에서 6학년이던 75년 9월 긴급조치 9호까지 이어지며 결국 3공은 1979년에 막을 내린다. 요컨대 나의 초등학생 시절은 박정희의 독재정치가 시작되며 심화되던 때였고 바른말만 하면 구속되거나 혹은 간첩 취급받던 때였다. 그 후 중학교 때는 초등학생 때에 비해 독재의 칼날이 거세지며 긴급조치로 인해 말 한마디 잘못하면 어디 끌려가서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던 살벌한 시기였다.


1979년 종신 대통령을 꿈꾸던 통치자가 최측근이 쏜 총으로 살해되며 혼란했던 정국에서 박정희를 신봉했던 신군부의 전두환이 체육관 선거를 통해 1980년 9월 마침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권력을 손에 넣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12.12와 5.18은 통치 기간 동안 계속 그를 쫓아다니며 정통성 및 정당성 관련 논란을 가져왔다.


그는 대통령이 되자 "성실한 사람만이 잘 사는 사회를 만들겠다"라고 했는데 82.5월 처가 관련 권력형 부정사건인 '장영자 사건'과 1983년 '명성그룹 사건'이 일어나며 정권의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그 후 처음 대통령 취임 때 밝힌 7년 단임후 평화적 정권교체란 대국민 약속을 뒤집으며 호헌선언을 하고는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쳐 직선제 대통령 선거를 하기로 하고 권력을 당선자 노태우에게 넘겼지만 그 후에 계속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다 저지를 당했고 문민정부가 출범한 후에도 정치에 복귀하려 하자 과거에 저질렀던 12.12를 다시 문제 삼아 국가 반란죄로 교도소 생활을 하다 사면으로 풀려났다.


3 공과 5 공의 통치자 박정희와 전두환은 군출신으로서 권력을 합법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손에 넣었고 통치의 명분도 남북 대치하에서의 안보 우선주의였던 점이 공통점이었던 반면 국정운영에는 차이가 있었다. 박정희는 리더였지만 참모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이 매사를 세밀하게 챙기는 스타일이라면 전두환은 보스형 리더로서 '모 아니면 도' 식으로 아랫사람에게 뭘 맡기면 전권을 주고 끝까지 뒤를 봐주는 스타일이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박정희는 고속도로의 모양을 자신이 직접 도화지에 연필로 그리기도 하였고 직접 헬기를 타고 건설현장을 점검하기도 하였다. 또한 주요 수출 관련 회의는 자신이 주재하며 중간중간 통계치를 보며 날카로운 지적을 하기도 했다.


반면 전두환은 자신의 경제 과외선생이던 김재익에게 경제수석을 맡겨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전권을 준 결과 5공 초기 두 자릿수이던 물가 수준을 짧은 기간 내에 안정시키기도 하였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임기 동안 지속적인 국민 저항이 이어졌으며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치적을 내세우며 자신만이 국가를 통치할 적임자라는 독단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박정희는 권력 말기 부마사태 때까지도 자신이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전해진다. 전두환도 통치기간 동안 늘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거짓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가 결국 국민의 저항에 부딪쳐 물러나게 된 것이다.


이렇듯 두 통치자는 합법을 가장한 불법으로 권력을 잡고 통치기간 동안 행정부는 말할 것 없이 언론, 사법까지 손에 넣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결국 자신의 한계를 모르고 끝까지 권력을 행사하려다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위의 두 통치자의 과와 공을 놓고도 논란이 일지만 한마디로 공이 있지만 과가 너무 많다 보니 공으로 과를 덮기가 어려운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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