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의 추억

by 최봉기

대부분 남자 동기들의 20대 때 최대 고민거리였던 병역의무를 소재로 스케치해볼까 한다. 내가 초등학교 때 처음 군대란 곳과 인연을 갖게 된 것이 위문편지였다. 저학년 때는 주로 "파월 장병 아저씨께"로 시작되는 말로, 월남전 종전 이후엔 "국군장병 아저씨께"로 서두를 장식했다. 당시엔 10.1일 국군의 날에 여의도광장에서 국군의 날 행사가 성대하게 거행되기도 하였다.


사실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은 남북이 대처하며 전쟁위험이 상존했고 20대 초반 가장 왕성한 나이의 남성들은 학업이나 생업을 중단한 채 군입대를 하게 되었다. 인생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아까운 20대 초반에 머리를 깎고 입영열차를 타거나 집결지를 향해 가는 모습을 떠올리자면 병역을 필한 지금은 빙긋이 웃음이 나오지만 당시에는 하늘이 노랗고 씹던 밥이 모래와 같았던 것도 사실이다. 여자 동기들도 아들을 군에 보내 본 경험이 있는 경우라면 군에 보내는 부모의 심정이 그리 예사롭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지금 군대야 구타가 근절되어 있고 식사 및 부식이나 보급품 등도 나름 양호하고 훈련도 과거보단 심하지 않아 졌지만 우리들 아제 때의 군 복무란 차원이 달랐던 모양이다. 대한민국이 후진국 수준이었고 상위계급자들이 배식에까지 손을 대다 보니 배가 고파 밤늦게 취사반에 숨어 들어가 먹을걸 훔쳐 나왔다는 얘기, 훈련 중 사망 사고 발생 (해병대 등) 얘기, 완전무장한 채 수십 킬로 구보(폭풍 구보) 하고 낙오하면 개머리판으로 내려 찍는다는 등 온갖 살벌한 얘기들이 전해지곤 하였다. 당시엔 도끼만행 사건, 무장간첩침투 등으로 데프톤이나 진돗개 2 등 비상이 걸리면 손꼽아 기다리던 휴가가 연기 내지 취소되는 일도 발생하곤 하였다고 한다.


인생에서 2년 이상씩 사회와 격리되는 군 복무에도 양극화 현상이 발생한다. 재수 좋게 줄을 잘 선 경우 무지 편한 부대에 배치되어 시도 때도 없이 잠만 자다가 뻑하면 외출 외박하며 룰루랄라~. 해병대, 특전대 등 훈련강도가 심한 부대에 배치될 경우 전역 때까지 생고생에 간혹 게거품까지 물기도~. 나의 경우는 대학원을 마친 20대 후반의 나이에 그것도 현역으로 입대를 하여 25개월 여간의 군생활을 정신적으로 꽤 힘들게 하였다. 훈련소에서 20대 갓 넘은 막내 동생 벌 되는 조교란 인간들 중 특히 학력이 낮고 성격상 문제 있는 친구들은 대학원 졸업자가 신병으로 들어올 경우 마치 지네들 먹이가 하나 굴러들어 온 듯 over action에 edlib까지 구사하며 무미건조한 군생활중 모처럼 지네들 스스로 자아실현의 욕구를 만끽한다.


나는 논산훈련소가 아닌 인젠 없어진 의정부의 306 보충대에 소집되어 수도 기갑사단 (맹호부대) 교육대에서 4주간 훈련을 마치고 포천의 기갑여단 내 대대 수송부에 배치되었다. 당시 나이가 28세. 중위였던 본부중대장보다 몇 살 위였고 대대에서 손위였던 사람은 대대장 포함 2명의 중대장에 각 중대 인사계 정도.


이등병이면서 노병이었던 내가 힘들게 군생활을 하면서 상병이 되자 자신의 존재감을 드높일 일이 하나 생긴다. 유격훈련 때 미군 장교 한 명이 파견와 잠시 소속 대대에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그 대대에서 영어회화가 가능했던 사람이 없다 보니 미국에서 MBA (경영학 석사)를 마친 나의 존재가 드디어 처음 수위로 올라왔다. 그때 육사 36기였던 대대장 눈에 들어 소속사단내 화학 대대가 미 2사단과 함께 실시하던 장갑차 연막 시범에 차출되어 통역을 맡았고 화학대 대대장이 우리 대대장에게 영어가 능통한 유능한 병사라고 치켜세워 주면서 나의 존재감이 급부상하였다.


그 공로로 주한미군들과 함께 하는 6성 치하 행사 (six star salute honoree)에 사단 대표로 참석할 수 있었다. 그 행사는 먼저 국방부에서 각 사단 대표들이 육참총장에게 신고하고 총장과 함께 커피를 마신 다음 인터컨티넨털 호텔에서 숙박, 장성 부부 들과 함께 호텔 고급 점심 연회 참석 등 군에서 병으로 상상하기 힘든 호화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군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하나 있다면 대대에서 거행된 국가관 발표 연설 대회에 소대 대표로 나갔던 일. 주제는 휴가 때 한 여성이 몇 명의 건달들로부터 집단 성폭행당하는 것을 직접 목격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였다. 발표대회 중간에 좀 늦게 와 자리에 앉던 대대장을 향해 "우선 제 차례가 가까워 지자 이렇게 직접 참석해주신 대대장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라고 있지도 않는 말을 지어서 하자 폭소가 터져 나왔다. 그리곤 "우리가 만일 군에 있지 않고 사회에서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해서 돈을 번다면 어느 때보다 더 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 명의 예외도 없이 하던 일을 다 뒤로 미뤄놓고 묵묵히 병영생활을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국가와 민족을 자키기 위해서 그런 거 아닙니까 또한 사랑하는 우리 가족을 우리 손으로 지키기 위해 그런 것 아닙니까?~~" 연설이 끝나자 상기한듯한 표정의 대대장이 보였고 나는 최우수상을 받게 되었다.


지금까지 군에서 있었던 일들을 소개해 보았다. '군입대'와 '군 제대' 이 둘은 앞에서 볼 때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입대 전 잠이 오지 않고 밥이 입에 들어가지 않던 일. 집결지를 향할 때 축 늘어지던 어깨. 하지만 전역 후 민간인이 되어 생활하는 지금, 휴가를 나온 검게 탄 얼굴의 군 후배들을 보면 그들 군복 주머니에 몇 푼의 점심값이라도 넣어주고 싶어진다. 속칭 '군바리'라 부르며 군을 비하하는 풍조가 있었고 국가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쿠데타로 권력을 쟁취하며 신성한 군의 명예에 먹물을 뿌린 자들로 인해 군 본연의 이미지가 실추되었지만 군을 경험한 사람들의 국가관은 비장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몸으로 직접 국가와 민족을 지키는 일을 해 봤기 때문이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능력과 그 외 소중한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