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함과 어리석음

by 최봉기

인간이 성인이 되는 과정은 어찌 보면 사회의 때가 묻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순수한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부대끼며 자기보다 세상을 더 경험한 사람들로부터 이용을 당하기도 하면서 손해보지 않고 실속 차리는 걸 배워 나가는 과정이라 한다면 지나친 걸까? 어릴 때엔 대개 세상을 잘 모른다고는 하지만 어릴 때부터 손해 볼 짓은 하지 않는 영악한 사람들도 더러는 있다. 반면 현실에 대한 이해나 감각이 부족하다면 남들에게 이용을 당하거나 고생해서 일해 남 좋은 일이나 시켜주는 경우도 있는데 나는 솔직히 후자에 가깝지 않았나 싶다.


대개 20대 초반에 대학에 입학하는데 나의 경우는 남들보다 1년 빠른 10대 후반에 대학생이 되었다. 대학생이 되면 서클, 미팅, 축제, 음주 등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학과 공부는 다소 등한시하는 경우가 많지만 나는 그때 오히려 점잖은 편이었고 학과 공부도 나름 하면서 역사나 철학 등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다 군입대 및 향후 진로 관련 고민을 하던 중 갑갑한 현실을 탈피하고 싶은 충동이 밀려오기 시작했는데 그때가 대학 3학년 때였다. 대개 저학년 때 한 번씩 연애경험도 있건만 나는 뒤늦게서야 한 여성을 마음에 두었다. 하지만 그녀는 군미필에 갈 길이 먼 동기생 1년 연하남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당시에는 나 혼자 에디트 비야프의 명곡 '장미빛 인생'이나 '사랑의 찬가'와 같이 삶과 사랑을 예찬하며 흰색 도화지와 같은 마음에 무지개색을 칠하곤 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35년이 지난 얘기지만 한 이성에 대한 동경과 사랑을 느낄 때엔 마음이 눈처럼 희고 시냇물처럼 맑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고 그 사람에게 어떤 불행이 닥치더라도 기꺼이 감싸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도 생겼다. 하지만 상대방이 그러한 마음의 절반이라도 가지며 공감대가 생길 때 두 사람 간에 사랑이 싹틀 수 있건만 혼자 일방적일 경우엔 아무리 숭고한 마음일 경우라도 공상 그 이상, 이하가 아님을 새삼 깨닫게 된다.


1968년 당시 '고무신 관객'으로 불리던 주부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서 온 나라를 감동시킨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에서 혜영 (문희 분)과 신호(신영균 분)는 서로 사랑하는 남녀 사이이다. 혜영은 하숙하는 신호를 돌봐주며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 하지만 어느 날 시골에서 신호의 처자식이 상경하고 나서야 혜영은 그가 유부남임을 알게 된다. 충격에 빠진 혜영은 종적을 감추는데 8년간 미혼모로 신호의 아들을 낳아 키우며 살다가 신호 앞에 어느 날 불쑥 나타난다. 신호는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안정적인 가정을 가진 가장으로 살고 있었다. 신호 앞에 아들 영신(김정훈 분)을 데리고 나타난 혜영은 학교에 갈 나이가 된 아들을 키워줄 것을 부탁한다. 영신은 보지도 못했던 아버지란 사람의 집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지만 이복형제들과의 갈등과 생모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적응하지 못한다. 결국 신호네는 엄마가 보고 싶어 집을 나선 영신을 찾아 돌아다니고 혜영 또한 영신이 보고 싶어 집 부근까지 와서 배회한다. 밤늦게 집에 돌아온 영신은 아버지에게 매를 맞는데 이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혜영은 눈물을 흘리며 자기가 낳은 자식은 자기가 키운다는 마음으로 영신을 시골로 데리고 가는 스토리이다. 혜영이 영신을 보러 온 골목에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영신을 본 혜영이 달려가 껴안으며 두 모자가 빗속에서 서로 엉켜 울던 장면에서 극장은 한순간에 눈물바다가 되기도 했다.


나는 성인이 되어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처음 볼 땐 별 생각이 없었는데 대학 때 순수했던 마음 하나만 가지고 모든 걸 해결하려 했던 나 자신의 모습이 영화 속 혜영과 오버랩될 때 전율을 느끼기도 했다. 내가 순수함 없이 현실적이고 영악했다면 한 이성을 고집하지 않고 여자 몇을 바꿔가며 즐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한 여자에 목을 매는 순정, 즉 순수함 때문에 지극히 비현실적이었고 일부러 험하고 고된 길을 돌아갔는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내가 결사적으로 지켰던 순수함이란 것도 상대에게는 별 특별한 의미를 주지 못했을 수도 있다. 오히려 자격증이나 집안의 재력 등 현실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흥정을 했다면 더 성공적인 거래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혜영은 한 남자를 순수하게 사랑했을 뿐 유부남인지 여부는 안중에도 있지 않을 정도로 사랑 자체에 충실했다. 하지만 나나 혜영의 순수함은 현실이란 공간에서는 어찌 보면 어리석음 이상 이하도 아니지 않았는가 하는 씁쓸함이 남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순수함을 가지고 젊은 시절을 보냈다는 사실이 그다지 후회가 되진 않는다. 왜냐하면 순수함은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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