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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의 의미와 우리의 자세

by 최봉기

오늘이 광복절인데 인제 77주년이 된다. 77년 전 원자폭탄이 일본 두 도시에 떨어지면서 천황이 드디어 항복 선언을 한다. 일본은 1910년 한일 합방으로 조선을 손에 넣은 후 1930년대까지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는데 누군가는 일본이 언젠가는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거라는 예언을 했다고 한다. 그 사람이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또한 북한이 남한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거라는 예언도 했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처음엔 '반민특위'가 결성되며 노덕술과 같은 악질 경찰과 이광수, 최남선 등 친일 인사들이 법정에 출두하게 되었지만 결국 '반민특위'도 해체되고 일제 때의 인물들이 다시금 과거의 영화를 누리게 되었다. 항일 운동하던 좌익들이 빨치산이 되어 지리산에 숨어 지내던 반면 과거 일본에 빌붙어 항일 인사들을 고문이나 하던 인간들이 뻔뻔하게 다시 어깨에 힘주는 것을 못 마땅해했던 한 인물이 중국, 소련과 협의하여 큰 일을 벌이게 되었다. 그가 김일성. 결국 해방은 분단을 낳았고 남북은 아직까지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다.


해방 전에는 학교에서도 우리말을 쓸 수가 없어 일본어를 사용하였고 조선에 이주해서 살던 일본인들도 많아 일본인들이 다니던 학교와 조선인들이 다니던 학교가 나뉘어 있었다고 한다. 서울에서는 전자가 서울고, 후자가 경복고. 일본인들 중 조선이 해방이 되자 자신이 하던 사업을 한국인 점원들에게 잠시 맡겨놓고 현해탄을 넘어간 사람들이 있었다는데 졸지에 점원은 팔자를 바꾸게 되기도 하였다. 조선인 경찰들 중에는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재산 목록을 확보, 그것들을 죄다 자기 걸로 만들며 졸부가 된 인간들도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부산 대신동의 사립 D대 창립자 정모.


아직도 그 시절이 좋았다고 그때를 예찬하는 인간들도 있었고 술자리에서는 어린 시절 배운 일본 노래를 부르며 향수를 느끼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노무현 정부 때 친일인명사전을 만들고 역사 바로잡기 운동을 했는데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했던 일부 인사들은 과거에 연연하지 말자며 제동을 걸었고 정권이 바뀌자 결국 역사 바로잡기가 원점으로 회귀. 일제 통치하 36년의 기간은 짧은 시간은 아니고 일제강점기 초기에 저항을 하던 지식인들이 1920년 이후부터 일본에 맞서는 것은 더 이상 불가항력이라고 생각하며 일본에 협조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에 협조했던 자들 중에서는 일본이 머지않아 세계를 제패할 것이란 논리를 제기한 인간들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일본은 패망하여 조선을 떠났다. 하지만 중국에서 일본에 저항했던 조선인들이 두 부류, 즉 한쪽은 모택동의 판로군, 또 한쪽은 장개석 군대 쪽으로 좌우 정렬한 후 남과 북으로 재정렬하여 싸운 전쟁이 한국전쟁. 결국 분단은 김일성과 이승만의 민족통합을 도외시한 이데올로기적 권력 지향주의에다 좌익 우익 군대까지 합성되어 제작된 것이었고 주변 국가들까지 분단으로 짭짭한 재미를 보니 그야말로 '트리플 엑셀'이었고 통일은 '그림의 떡'과 같이 되어 버렸다.


목숨을 걸고 조국독립을 위해 타국에서 생고생을 한 사람들은 국내에 돌아와서도 큰 환대를 받지 못했는데 그 이유가 뭘까? 이미 국내에서 자리 잡고 살던 기득권층이 자신의 기반을 포기하기 싫어서 그랬던 것이다. 그들이 주로 친일 명부에 등재된 인물들. 해방 이후 시간이 오래 지나면서 친일에 대한 재조명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일제 때 창씨개명을 한 사람들을 과연 모두 친일행위를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당시엔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쌀 배급을 받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당시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이 신문이나 책에서 나온 얘기를 가지고 와서 친일 운운하는 것도 조금은 조심해서 말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당시 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감시와 위협이 갈수록 야만적이었던 상황에서 목숨 걸고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인데 그 정도 애국을 한 사람이라면 그들 자손들이라도 값진 보상을 받아야 하는 것이고 반면 나라를 팔아먹었거나 동포에게 각종 피해를 준 사람들이라면 나름 합당한 기준을 정해 응징함이 마땅할 것 같다. 한심하게도 명백한 친일분자가 독립유공자로 둔갑해 있고 나라를 구하려 목숨까지 걸었던 독립유공자와 그 가족들이 생계를 이어가기도 어렵다는 사실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의심케 한다.


77회 맞는 광복절에 아직 이런 진부한 얘길 반복해야 하는 것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위에서 언급했던 노덕술은 과거 국회의원에 출마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경력에 '악덕 친일경찰간부'라고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런 인간들은 모름지기 해방 이전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사회를 지키기 위해 봉사를 해왔다고 선전하지 않았을까? 낯이 뜨거워진다. 노 씨의 후손들의 근황이 갑자기 궁금해진다.


일본에 대한 감정이 갑자기 달라지긴 쉽지 않다. 하지만 단지 미워하기만 하기보단 왜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과 치욕스러운 과거가 반복되지 않도록 할 각오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110여 년 전 일본이 조선을 좋지 못한 방법으로 손에 넣었을 때 당시 조선의 지배층들은 300여 년 전 임진왜란을 겪고도 별반 달라진 게 없지 않았는가? 지금의 우리, 특히 정치지도자들도 자신들의 이익만 좇고 한심한 짓거리나 할 경우 그런 꼴을 한번 더 당하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


일본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는 한반도의 핏줄인 경우가 꽤 있다. 과거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패망하며 약 5만 명의 유민이 배를 타고 일본으로 넘어갔다고 하며 그들은 일본의 지배층이 되었다고 한다. 얼마 전 고인이 된 아베의 이름 '安倍'는 과거 백제에 실제 있던 이름이기도 하다. 대한민국과 일본은 거리상 무척 가깝지만 서로 우호적이기보단 원수에 가까운 관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르긴 해도 패망한 백제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선조가 신라로부터 당했던 모욕감을 대신 갚아주려 한반도를 쳐들어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의 경제적 위상이나 제반 국가적 역량이 과거와는 크게 달라졌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이제는 구시대적 대립이 아닌 새로운 차원의 한일관계가 요구될 것이다. 일본만 보면 욕을 하고 싸우려 하는 감정대립도 더 이상은 의미가 없다. 일본이 잘하고 있는 것은 칭찬도 하고 배우기도 하지만 진정 그들이 인정하고 그들을 이끌 수 있는 당당하고 멋진 이웃 나라 대한민국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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