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사는 곳에는 대등한 관계보다는 주와 종의 관계가 더 많은 게 사실이다. 말이 좋아 대등한 관계지만 어린 시절 혹은 학창 시절의 친구 정도를 제외하면 사회생활에서는 대개 관계가 위아래로 나뉜다. 공직의 경우 고시합격자는 여성이라도 고위공무원이 되어 직급이 아래인 연장자들에게 업무지시를 하고 고과를 하는 위치에서 일한다.
위아래의 관계 중에서 남과 여를 놓고 본다면 역사적으로 서양과 동양에 공히 여왕이 있었지만 그건 특수한 경우였고 남자가 줄곳 세상을 통치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사회에서 남녀는 각각 종사하는 분야가 나뉘어 있었다. 주로 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가사일로 오랜 세월을 지내왔다. 그러다 세상이 바뀌어 남자와 여자가 종사하는 일도 갈수록 구분이 희미해지며 이제는 우습게도 남자가 독식하던 정치나 경제 혹은 법률, 학문, 스포츠와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여성의 수가 늘었고 반대로 여성이 독차지했던 패션과 요리 등의 분야에서 일하는 남성이 늘어났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지금은 가정이나 직장에서 남과 여의 위아래 관계가 과거처럼 남자가 위, 여자가 아래로 획일적이지 않다. 세상 위계질서의 기준이 나이나 경력보다 능력이기에 남편과 아내의 주종관계란 것도 경제적 능력으로 정해지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능력이 있는 쪽이 가장이 되며 그 상대는 가장역할을 하는 이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남자 쪽이 능력이 있으면 가장으로서의 권위가 서지만 반대일 경우 남자의 권위가 땅아래로 떨어진다. 이 경우 여자가 사려심이 깊지 못하고 오만할 경우 남자는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기도 한다.
IMF 금융위기 때 나온 영화 '해피엔드'(최민식, 전도연 주연)는 이러한 남자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여자는 영어학원 원장이자 사업가이며 가장노릇을 하는 반면 남자는 실직자로 집에서 육아를 맡으며 배우자의 무시와 빈정거림에 시달린다. 남자는 헌책방을 다니며 통속소설을 읽는 게 삶의 무료함을 달래는 유일한 방편이다. 그 와중에 여자는 학원의 미혼 강사와 바람이 나는데 남자는 그 사실을 알고 배신감을 느낀다. 밀애 관계인 남녀가 함께 술에 취해 아파트 주변에서 서성대며 엽기적인 모습을 벌이는 걸 목격한 남편은 드디어 증거를 남기지 않고 감쪽같이 그녀를 살해하는데 그 후 살인 제보를 받은 경찰은 내연남을 살인 혐의자로 구속수사하며 막을 내리는 스토리이다.
위아래로 경직되고 명령 하달과 수명 일변도의 수직적인 인간관계는 마치 빙하기가 온 듯 수평적이고 협조적인 관계로 바뀌었고 부부 혹은 부자간의 관계도 마치 친구처럼 높은 장벽이 무너지고 있다. 가정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남자가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위치에서 일을 하고 여자는 가정을 지키거나 함께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온전한 가정도 있지만 남자가 원치 않게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당하거나 건강에 이상이 와서 가장의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코미디의 황제 이주일은 한 가정의 가장이었지만 인기를 얻기 전 지방공연이나 다니는 무명생활을 꽤 오래 하며 설움을 받다 어렵게 TV에 출연해 크게 성공을 했고 그 이후 제대로 된 가장노릇도 하게 되었다. 지금은 굳이 남자 혹은 여자 중 누가 가장인가 하는 구분조차 희미해진 세상이 되었다. 심지어 '소년가장'도 있다. 남자든 여자든 능력이 되는 사람은 나가서 돈을 벌고 시간이 되는 사람은 가족을 위해 요리도 하고 빨래나 청소 등 온갖 허드렛일도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게 겉치레 없는 진정한 가정이 아닐까? 제2의 해피엔드와 같은 가정이 나오지 않길 손 모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