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있어서 주관이 강하다는 건 여러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는데 유불리만 놓고 본다면 불리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주관이 강하다는 것은 설령 그걸로 인해 불이익을 당한다고 해도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진정 신념을 가지고 주관대로 산다면 언젠가는 먹구름이 사라지고 찬란한 태양이 비칠 날이 올 거니와 정 그렇지 않더라도 비굴한 것보다는 나은 게 아닐까 싶다.
주관의 강약을 그때그때 조절하면서 나름 유연하게 처신한다면 자신에게 좀 더 유리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위의 두 유형은 야구에서 홈런타자와 단거리 유형의 교타자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럼 홈런도 치고 단거리도 함께 칠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이긴 한데 그런 유형은 그다지 흔치 않고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통치하는 조선을 등지고 중국으로 가 독립운동에만 주력한 사람이 있고 조선에 남아 일본의 개가 된 사람이 있는 반면 일본이 통치하는 조선에서 일본과 조선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며 가교역할을 했던 중도적 인물도 있었다. 첫 번째가 김구, 두 번째가 노덕술, 세 번째가 여운형이다.
김구는 독립운동가로서 누구나 알고 있는 인물이지만 여운형은 김구만큼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그가 했던 일은 어찌 보면 일본이란 절대강자 앞에 맞서지 않고 그들 눈치나 본 겁쟁이로 보일지도 모른다. 또한 해방이 되자 그는 여러 번 테러를 당했고 결국 암살을 당했다. 일부 지식인들은 해방 이후 정국에서 여운형과 같은 인물이 살아 있었다면 좌와 우간 충돌 및 이로 인한 끔찍한 전쟁도 피할 수 있었을 거라고도 말한다. 김구란 인물은 민족지도자로서 일제에 끝까지 저항을 했고 그 후에도 분단을 막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그가 있음으로써 입지가 불리해진 세력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일 여운형이 권력을 잡았다면 친일 청산도 좀 더 유연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반민특위가 결성되며 친일 청산을 하려다 실패했던 걸 보면 너무 경직되었던 건 아닌가 싶다. 살기 위해 또한 갈수록 조선의 독립은 멀어져 보였기에 친일 인사들의 수는 갈수록 늘게 되었던 것이다. 일제 때 그 체제 속에서 일했던 인물들을 다시 현장에 복귀시킨 주역은 맥아더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민족정통성 확립과는 무관한 질서유지였다. 이를 권력자 이승만도 그다지 반대하진 않았던 것 같다. 아무튼 친일청산은 그다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양극단은 늘 충돌하기 쉬우며 충돌할 때 왠지 더 멋있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누가 이기든 한쪽은 몰락과 함께 새로운 충돌을 가져온다. 이러한 양극단의 폐해를 막을 수 있는 게 중도 혹은 실용주의인데 이러한 유형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재성찰이 필요할 것 같다. 이제는 결론도 없는 걸 가지고 싸우기만 하는 양극단보다 중도의 대안에 귀를 기울여봤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