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는 십자가가 걸려있는 교회와 성당이 전국 방방곡곡 어디든 눈에 띈다. 그곳에는 목사와 신부들이 그 지역의 신자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한다. 목회를 하려면 돈이 필요하기에 주일 예배나 미사 때 헌금을 걷을 뿐 아니라 정기적으로 십일조나 교무금도 받는다.
개신교는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 여러 교파가 있는데 각 교파마다 예배의 형식 및 성서의 해석에 일부 차이가 있다. '영락교회'와 '충현교회' 및 '사랑의 교회'와 같은 역사가 오래되고 신도수가 많은 교회가 있지만 이런 대형교회는 몇 안되고 중간 규모 혹은 신도가 몇 안 되는 개척교회가 훨씬 많다.
작은 교회는 목사가 안정적인 생활을 하기가 어려워 경비직 등 부업을 함께 하기도 한다. 중견 교회의 경우 담임 목사가 열심히 목회를 해서 신도수가 많아지고 헌금이나 십일조가 많이 걷히면 외제차에 자녀를 해외 유학까지 보내며 여유롭게 지내기도 한다. 어느 목사 한분이 자기는 하느님 말씀을 잘 전하기 위해 안전해야 하므로 좋은 차를 탄다고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말을 들은 누군가가 "무슨 말씀이세요? 부르시면 바로 가셔야 지오"라고 말하자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며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어럽게 키워놓은 교회를 남에게 주기 아까워 자식에게 세습하는 교회가 늘자 이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에 최근 감리교는 목사직 세습을 공식적으로 금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천주교는 성직자인 사제와 수녀가 모두 독신이며
개신교와 공히 성서를 기본으로 하지만 구세주 예수의 모친 동정녀 마리아를 따로 경배하지 않는
개신교와 달리 마치 여신과 같이 우러러본다. 천주교는 지휘계통이 교황을 정점으로 그 아래에 추기경, 대주교, 주교와 사제가 국가나 지역을 관리한다. 개신교의 목사가 '개인사업자'라면 천주교의 사제는 '공무원'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천주교는 6년간 신학대학 과정을 마치면 기도에 전념하며 수도자의 길을 가는 수사신부와 본당사목을 맡는 본당신부 중 하나를 택하게 한다. 본당신부의 경우 매달 꼭 필요한 정도 액수의 급여를 받고 지내다 정년퇴직을 하는데 과거에는 퇴직금이 따로 없어 퇴직 후 생활이 어려웠지만 지금은 본당신부를 할 동안 들어온 헌금의 일부를 개인소유로 인정해 줌에 따라 5년간 한 본당에서 사목을 하며 적금을 든 돈의 절반을 본당에 주고 절반을 소유하는 것이 관행이 되어 있다.
목사나 신부는 종교인이지만 어찌 보면 생활인이다. 다시 말해 목회를 해서 들어오는 돈이 없다면 생활이 어려운 것이다. 신부야 독신이라 혼자만 챙기면 되지만 목사는 가족의 생계가 그에 달려있기도 하다. 따라서 성서의 말씀을 전하고 실천하는 게 본연의 사명이지만 먹고사는 문제가 늘 따라다니니 예수님처럼 무소유의 삶을 산다는 것이 감당하기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목사의 설교도 성서 말씀의 이해나 실천뿐 아니라 하느님이 임하시는 교회에 재물을 바치면 하느님의 축복이 내려 집안이 평화롭고 자식들 교육, 가장의 사업이나 진급 등도 잘 풀린다는 식의 내용이 점점 많아지는 게 현실이다.
천주교 사제의 경우 독신으로 지내지만 폐쇄적인 환경에서 독신으로 복음을 전하며 사목 활동을 하는 일이란 게 또한 그다지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생기는 일이 미성년자 대상 성추행 혹은 동성 간의 성희롱 내지 성추행 문제이다. 최근에 내가 과거 다녔던 성당에서 신학대학에 입학했던 두 형제가 신학대학을 졸업하지 않고 중도에 나온 일이 있었다. 사랑하는 이성이 생겨서 그런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 이유를 정확히 알진 못한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때 세례를 받은 이후 40여 년을 천주교신자로 지내왔다. 그러다 10여 년 전부터 성당을 나가지 않고 있는데 그러한 현상을 성당에서는 '냉담'이라고 부르곤 한다. 나의 경우는 사제나 신자들의 신앙에 대한 태도에 뭔가 문제가 있고 주일날 가서 미사 참례하는 게 나의 삶에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러한 나의 입장을 나름 떳떳하게 말하곤 한다. 주 1회 성당에 가서 거룩한 척하는 게 신앙생활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성당에서 사제는 대개 성서의 실천보다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사제들은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오래 지내서 그런지 자신들의 태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보단 오히려 당연시한다는 생각도 든다. 또한 신자들은 주일에 교회에 나가고 헌금을 하면 하느님의 보호를 받고 구원도 받게 된다는 기복신앙에 빠져 있다고 생각된다. 남들이 어찌 될지라도 자기와 자기 가족만 주님의 보호 속에서 편안히 살면 된다는 착각에 빠져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만일 주머니에 돈이 없어 성당에 가서 밥이라도 먹게 해달라고 한다면 아마도 주임신부란 사람의 입에서는 "교회는 기도하는 곳이지 구걸하는 곳이 아니다"라는 말이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독생자 예수를 세상에 보내 우리의 죄를 대신 사함 받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까지 흘리셨다는 강론을 주일마다 반복하기만 하는 것이다.
인간은 역사적으로 의지할 절대적인 존재를 찾아왔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연재해, 질병과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안감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새벽에 정안수를 올려놓고 손을 비비며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령님께 비나이다"라는 주문을 외우곤 하였다. 현대판 "비나이다"가 교회나 성당에서 하는 기도가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성서의 가르침은 '우상 숭배 대신 하느님 경배', '원수까지 용서하고 사랑하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기'이다. 하지만 교회는 금송아지 대신 '돈'이란 현대판 우상을 숭배하며 이웃이 어떤 재앙을 당하든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무탈하면 교회에 나가 헌금을 하고 하느님께 기도를 해서 받은 은총이라 생각한다.
위에서 지적한 현재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부인할 사람은 없으리라 보인다. 교회에서는 예수님이 권위적이고 율법만 내세우던 바리사이나 사두가이와 싸우며 그 대신 '용서'와 '사랑'이란 새로운 계명을 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는 말만 하며 실천은 하지 않는 공허함을 전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 혹자는 "예수님이 다시 세상에 온다고 할 경우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할 사람은 목사와 신부"라고까지 말한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오랫동안 쌓아온 기득권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기 때문이다.
'하느님보다 돈을 숭배'하고 '주일만 거룩한 척'하며 '자신의 복만 비는' 구조적인 문제를 탈피하기 위해서는 뭔가 근본적인 개혁이 요구된다. 내가 생각하는 혁신적인 대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에서 성서의 말씀의 본질에 충실하기보다 귄위적이고 현실에 안주하기만 하는 성직자는 사목에서 제외시키도록 한다.
둘째, 성직자란 사람들도 별도의 직업을 가지도록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반대학을 졸업해 직장이 있는 사람 중심으로 신학대학에 입학하게 하는 것이다. 성직자들이 다른 수입원이 있다면 복음 말씀에 보다 충실할 수 있으며 현실에 대한 이해가 있는 사람은 사목도 더 잘할 수 있다.
셋째, 교회에서 기복적인 신앙대신 실천적인 신앙을 전하도록 한다. 굿을 하러 나오는 사람들은
교회대신 무당집으로 보낸다. 또한 되도록 말보다 몸으로 실천하는 신앙 활동의 비중을 늘리도록 하며 주일날 교회에 나가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식의 그릇된 신앙인의 의식을 개혁하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