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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봉기 May 09. 2024

크리스천이던 이가 교회에 나가지 않는 이유

인간은 현재 질병과 전쟁 그리고 죽음이란 한계상황 속에서 불안하게 살지만 聖書에 의하면 태초에는 그렇지 않고 永生을 누렸던 걸로 나온다. 과연 영원한 삶 또는 영원한 기쁨이란 존재하는 걸까? 성서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이란  樂園에서 살고 있었는데 추방되어 현재와 같이 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하느님은 인간을 어여삐 여겨 독생자 예수를 보내어 죄인인 인간 대신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처형되었기에 인간의 죄는 사함을 받았고 하느님을 믿고 따르면 救援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살아왔지만 현실화된 종교, 특히 祈福信仰 혹은 교회만이 구원의 유일한 대안이라는 권위적이고 일방적인 敎示가 싫어 현재는 교회와 거리를 두며 살고 있다. 하지만 결코 無神論者가 되어버린 건 아니다. 또한 인간이란 존재는 결코 오만해서는 안 되며 존재 자체에 대해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주일날 교회에 가서 잠시 거룩한 옷을 입고 주를 찬양하고는 곧장 世俗으로 돌아와 다시 때 묻은 옷으로 갈아입고 사는 것에 대해서도 회의감이 생긴다.


최근에는 '죽음학'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사후 세계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近死體驗이란 숨이 끊어진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경우인데 사망을 하면 魂靈이 육체를 빠져나와 어두운 터널 같은 곳을 지나 공원 같은 곳에 이르는데 그곳에서는 이미 세상을 떠났던 이들을 만난다고 한다. 또한 죽음학에서는 성서에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 前生에 관한 꽤 구체적인 사례들을 요목조목 보여준다. 나의 경우 과거에는 聖書만이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한 비밀을 알려준다고 믿었건만 성서도 하늘에서 내려온 책이 아니라 영적 체험을 한 인간들의 기록을 모은 것이란 생각이 든다. 혹자는 성서의 내용은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눈을 감고 기도만 한다고 될 일은 아닌 것 같다.


죽음학에서는 인간은 육체와 영혼의 결합체로 육체는 늙으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육체를 이탈해서 어딘가에 머문다고 한다. 영혼은 살아 있는 사람 앞에 나타나는 일은 없지만 간혹 꿈을 통해서 나타난다고 한다. 성서에서는 예수님이 세상의 마지막날 다시 세상에 내려오시어 심판을 통해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가려낸다고 한다. 그렇다면 세상의 종말은 과연 언제일까? 종말이 가까웠다는 말은 2,000년 전으로부터 소급되며 성서에 나오는 종말 관련 내용은 아무도 그날은 모르며 종말의 징후로 자연재해와 전쟁을 든다. 사람은 善과 惡을 함께 가진 존재라는 생각이 드는데 장작을 두 조각내듯 인간을 두 가지로 구별하는 건 과연 가능한 걸까?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명쾌한 해답은 보이지 않고 베일에 가려져 있다. 하지만 현재 크리스천이란 이들은 주일을 지키고 교회에 헌금을 하면 죄를 사함 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 하나로 살고 있는지 모른다. 성서에는 부자가 천국에 가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건만 크리스천들은 교회에 열심히 나가면 하느님이 부자가 되게 해준다고도 한다.


이렇듯 성서에 기록된 죽음, 종말, 최후의 심판과 부자 등에 관한 내용은 왠지 수긍이 잘 가지 않는다. 영원한 생명에 관한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구원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한다면 주일마다 교회에 빠지지 않고 나가거나 헌금하는 것 못지않게 성서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규모나 크리스천들의 재산도 현재보다는 적어져야 하리라 보이며 현세에서 청빈하게 사는 것에 보다 큰 자부심을 가질 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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